무더운 여름날에도 왕청현 대흥구진 홍일촌에 위치한 김상화렬사릉원을 찾는 각계 대중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상화는 길림성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후동촌에서 태여났다. 그는 1919년부터 현지의 반일애국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24년, 김상화 일가는 왕청으로 이사했고 그는 그곳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접수함과 아울러 반제반봉건의 혁명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1930년 7월, 김상화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 후 중공하마탕구위 서기 직무를 맡았다.
1931년 2월, 왕청현 북하마탕 대방자촌에서 김상화, 북하마탕당지부 서기 한영호 및 전 촌의 청장년들이 반동무장 ‘토벌대’에게 체포되였고 김상화가 첫번째로 심문을 받았다. 적들의 고문에 김상화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경멸의 눈빛으로 적들을 쏘아보았다. 잔인한 적들은 김상화의 두 손가락을 쇠고리에 끼워 나무에 매달고 그를 혹독하게 때렸다. 두 손가락은 뼈까지 드러났으나 그는 당의 비밀을 한마디도 루설하지 않았다.
김상화에게서 아무런 비밀도 얻어내지 못한 적들은 김상화를 사방산 자락에 끌고 가 마지막으로 회유했지만 김상화의 조롱만 받았다. 잔인한 적들은 작두로 김상화와 한영호의 머리를 잘라 대방자촌 중심에 있는 느릅나무에 매달았다. 여러 민족의 혁명군중들은 흉악한 적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조직의 선도 아래 눈물을 머금고 렬사의 유체를 입관하고 추모회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십진가>를 창작하여 희생 당시 겨우 31세에 불과했던 김상화 렬사를 칭송했다.
2007년, 왕청현인민정부는 대흥구진 홍일촌의 기념비를 중심으로 김상화렬사릉원을 신축했고 2013년과 2017년에 루계로 120만원을 투입하여 증축했다. 현재 김상화렬사릉원의 부지면적은 400평방메터에 달하고 기념비, 릉원, 광장 등 3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다. 14메터에 달하는 기념비의 높이는 동북항일련군의 14년 항전을 상징하고 90.16평방메터의 비좌는 9016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왕청현에서 살고 있는 왕청인민들이 민족의 해방을 위해 희생한 영렬들을 시시각각 추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념비 뒤에는 김상화 렬사의 유해를 모신 무덤이 있다.
릉원이 완공된 후 관련 부문은 홍일촌 당성교양관에 김상화 렬사의 영용한 사적을 전시했다. 2021년 김상화렬사릉원을 포함한 홍일촌 당성교양기지는 길림성당위, 길림성인민정부에 의해 성급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명명되여 성 내외 각계 대중들이 애국주의교양을 받는 중요한 장소, 전 주 당원, 간부 및 광범한 청소년들이 애국주의교양 활동을 전개하는 중요한 홍색교양기지로 되였다.
정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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