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전장, 지금 어디에 있는가?

2025-07-09 08:43:55

7일, 상해시 보산구 우의로 1호에 위치한 상해 송호항일전쟁기념관 승리광장에서 <의용군행진곡>이 울려퍼지면서 장엄한 의식이 거행되였다. 사면팔방에서 모여온 사람들이 숙연히 서서 묵념하고 생화를 바치면서 전민족 항일전쟁 폭발 88돐을 기념했다.

상해 송호항일전쟁기념관이 위치한 이곳은 1937년의 8.13 송호항일전쟁(송호회전)의 주요전장중 하나였다. 이 기념관은 1932년과 1937년 두차례의 송호항일전쟁의 장렬한 력사를 기록하였으며 동시에 1931년 9.18사변 후 중국 군민의 14년간에 걸친 항일전쟁의 비할바없이 간고한 로정을 보여주었다.

기념관에서 남쪽으로 20킬로메터 떨어진 상해 홍구에는 팔자교와 송호철도 천통암역유적지 등 항일전쟁 유적지가 있다. 두차례의 송호항일전쟁에서 이 교통요충지들은 모두 적과 아군이 치렬하게 사투를 벌린 쟁탈지였다.

1932년 1월 28일, 일본 해군륙전대가 상해 갑북을 기습하자 중국 제19로군은 총지휘 장광내와 군장 채정개의 지휘 아래 팔자교 등지에서 침략자들에 대해 반격했다.

1932년 1.28 송호항일전쟁 장령의 후손이며 화동사범대학 퇴직교수인 심견은 “비록 적과 아군의 실력의 차이가 현저하고 특히 군사장비의 모델과 품질 차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19로군은 중국인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이것은 상해라는 이 ‘영웅의 도시’가 기억해야 할 영광스러운 한페지다.”라고 말했다.

1.28 사변 후 중국 군대는 완강하게 침략자들에게 저항하였으나 일본군이 류하를 기습하여 상륙하자 중국 군대는 퇴각하여 수비했다. 국민당정부는 일본침략자와 <송호정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37년 8월 13일 상해 홍구 팔자교 및 그 주변에서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재차 도발하여 송호회전이 폭발했다.

송호회전은 중국의 전민족적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첫 대형 회전이였다. 불과 피의 처절한 전투는 3개월간 계속되였다. 결국, 중국 군대는 일본군의 ‘3개월내에 중국을 멸망시킨다’는 오만한 계획을 분쇄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군민의 항일전쟁 열기를 빠르게 불러일으켰다.

회전이 폭발한 후 제88사 264려가 주공부대로 투입되였다. 려장 황매흥은 일찌기 1.28 송호항일전쟁 때 한개 퇀의 장병들을 거느리고 이틀 밤낮을 일본군과 혈전을 벌린 적이 있는 장수이다. 이번에 송호전장에 복귀한 그는 부대를 이끌고 련속 돌격하였는데 갑자기 포탄 파편에 복부를 관통당해 현장에서 희생되였다. 황매흥의 영웅사적은 남경에 전해지고 연안에도 전해지면서 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나라를 구하고 생존을 위해 분초를 다투려는 불씨를 지펴주었다.

1937년 8월 하순에 일본군 증원부대가 상해 보산 라경진 소천사 등지에 상륙하면서 이 간고하고 치렬한 회전은 도시의 골목에서 주력 결전단계로 전환되였다. 상해 송호항일전쟁기념관 관장 공상준은 “보산현성을 지키고 있던 영장 요자청은 전 영의 600명의 장병을 이끌고 7일간 적들과 접전하면서 일본군의 해, 륙, 공의 련속 공격을 격퇴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거의 전부 전사했다. 희생된 그해 요자청은 고작 29세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요자청 항일 희생처’ 석각기념비와 보산 고대 성벽 유적지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해 송호항일전쟁기념관은 이 유적지와 함께 기념공원내에 자리잡고 있다. 국가 2급 박물관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매년 30만명 이상의 방문객들이 첨앙하러 찾아온다.

기념관 상설 전시장에는 관람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대형 사진이 전시되여있다. 일본군의 폭격이 끝난 페허 속에서 홀로 남겨진 중국 어린이가 울고 있는 이 사진은 마치 전쟁이 초래낸 깊은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상해사범대학 교수이며 상해항일전쟁및세계반파쑈전쟁연구회 회장인 소지량은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허 속의 ‘중국 어린이’의 이미지와 이후 사행창고 보위전의 ‘팔백용사’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해외 여론을 뜨겁게 달궜고 중국의 정의로운 전쟁 승리를 지지하는 국제적 지지 열기는 더욱 거세졌다.

수치에 따르면 중국이 송호회전에 투입한 70여만명의 병력은 70여개 사로 구성되였으며 장병들의 본적은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전민족 항일전쟁이 일어난 후 공업, 농업, 상업, 교육, 의학 등 모든 계층이 례외 없이 잇달아 항일전쟁의 대용광로로 뛰여들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일본군이 상해 옛 거리를 폭격한 후 중국공산당은 당원과 병사를 지속적으로 확충하며 수천명의 신생 력량을 륙속 근거지에 보냈다.

심견은 지금까지도 항일전쟁 당시 서신을 정리하면서 후손들에게 항일전쟁의 력사를 알리고 있다. 그는 “중화민족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송호전선은 남북을 가리지 않고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으며 각지의 장병들이 일본에 맞서 나라를 구하자는 호소에 호응해 가정을 떠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단결 분진했는데 이것이 바로 중화민족의 불굴의 정신과 기백이다. 력사를 명기해야만 현재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을 수 있다.”고 감명깊이 말했다.

최근 몇년 동안 상해 송호항일전쟁기념관은 귀중한 문화재를 엄선하여 몰입형 해설과 붉은넥타이 자원봉사를 융합시키고 상황 재현식 공연을 통해 방문객들이 예전의 전장으로 ‘시간려행’을 하도록 했으며 정신적으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상준은 “송호 영렬들의 이야기는 대를 이어 전해져왔다. 우리는 위대한 항일전쟁 정신을 고양해 사람들이 력사를 명기하고 평화를 소중히 여기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허효청 가원곤 적춘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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