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대학 학생에서 항일 선봉으로 된 양학성

2025-07-24 08:37:08

그는 청화대학 학생으로서 민족의 생사존망이 위기에 처했을 때 거리에 나서 항일구국을 웨쳤다. 그는 항일장군으로서 항일전쟁 상황이 치렬하고 국토가 잇달아 함락될 때 결연히 호북 중부의 농촌으로 달려가 ‘여덟자루의 총’을 기반으로 적후에서 유격무장을 발전시켰고 여러차례 일본군과 괴뢰군의 기세를 꺾어놓았으며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적들과 싸웠다.

■양학성


무한시 황파구 목란산 남쪽 기슭에는 항일영렬 양학성이 잠들어있다. 황파에서 기층 사업에 참여한 청화대학 졸업생 손흠적은 “학창시절 선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의 고향에서 일하게 되니 그때 당시 선배의 선택의 무게를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양학성은 1915년에 호북 황파 연자강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1934년, 양학성은 우수한 성적으로 청화대학에 입학하였다. 청화원에 처음 들어온 그는 말수가 적었고 본분을 지키고 내성적이였으며 과외활동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9.18사변 후 일본침략자들은 화북쟁탈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국민정부는 거듭 타협하고 양보하면서 항일구국운동을 극력 제압하여 수많은 애국청년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화북이 크다 해도 이젠 더 이상 책상을 놓을 수조차 없게 되였다.” 1935년, 12.9운동이 폭발하자 양학성은 수천명의 학생들과 함께 군경의 봉쇄를 뚫고 거리로 나와 항일구국을 웨쳤다. 그 후 그는 북평학련이 조직한 남하선전단에 가입하여 찬바람과 모래바람을 맞으며 농촌에 내려가 항일구국의 불씨를 넓은 농촌에 뿌렸다.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학생’에서 ‘전사’로 변했다. 1936년,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집단토론에서 그는 앉는 것부터 일어서는 것 그리고 걸으면서 말하는 것까지 항상 모두의 열정을 불태웠다.” 양학성의 조카 양동명은 양학성과 함께 일했던 옛 동지들이 양학성이 사상동원 사업을 잘한다고 칭찬했다고 회상했다.

1937년 7.7사변 폭발 후 북평이 함락되자 양학성은 9월초 무한에 도착해 중공장강국 청년위원회 위원, 호북성(사업)위원회 청년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같은 해 12월, 그는 호북청년구국단을 설립하고 이를 령도했다. 이 조직은 순식간에 5만여명으로 늘어나 무한 항일구국운동 고조에서의 중요한 력량으로 되였다.

전국의 항일전쟁은 도처에서 일어났고 일본군은 화중으로 진격했다. 1938년 8월, 조직의 명령에 따라 양학성은 호북 중부에 가 동지들과 함께 항일근거지를 창설했다. 응성의 하가묘에서 그들은 항일골간 300여명을 양성하여 호북 중부의 적후 무장투쟁을 위해 튼튼한 조직적 기반을 닦아놓았다.

응성이 긴급상황에 처하기 전날, 그는 ‘빌어먹더라도 총 한자루를 얻어오겠다’며 현지 현당위를 이끌고 맨주먹으로 무력조직 건설에 나섰으며 ‘여덟자루의 총’을 기반으로 응성현 항일유격대 제4지대를 창설했다. 1939년 6월, ‘응성항일’ 주력부대가 신사군에 재편입되여 호북 중부와 하남 남부의 무장세력이 통일된 지휘를 받게 되였다. 양학성은 지휘의 중요한 여러 직무를 력임했으며 전사들과 고락을 함께 하고 풍찬로숙을 하며 적진의 적후 유격투쟁을 견지했다.

“당시 조건이 곤난하여 둘째 큰아버지는 벼룩이 잔뜩 생긴 낡은 옷을 입고 전사들과 함께 한칸짜리 토담에서 일했다.” 양학성은 이렇게 말했다. 1939년, 할머니는 아들이 응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녀들을 데리고 엿새 동안 걸어 아들을 찾아갔다. 부대의 사령관은 그의 집이 가난한 것을 보고 몰래 양씨 어머니에게 은전 두개를 쥐여주었다. 이를 알게 된 양학성은 어머니에게 ‘지금 대오가 어려우니 조직에 누를 끼치면 안된다’며 돌려주라고 간청했다.

1942년 8월, 양학성은 신사군 제5사 호북하남 병단 정치위원을 겸하고 부대를 이끌고 호북 남부에 항일근거지를 개척했다. 고향인 황파를 지날 때 그는 청년들이 참군하도록 동원했다. 집에 묵던 날 밤 어머니가 장가를 빨리 가라고 권하자 ‘나라가 해방되지 않았는데 가정을 꾸릴 마음이 어디 있겠는가’고 말하며 가족들에게 ‘승리하면 반드시 무한으로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오랜 전투생활과 학업중에 생긴 페질환은 그의 몸을 망쳤다. 1944년 3월, 양학성은 대오산 고가와에서 병으로 인해 향년 2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항일전쟁 승리 후, 영웅은 고향에 묻혔다. 오늘날 황파에서는 청명절과 7.1 등 시기가 되면 양학성 묘지에 추모하러 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손흠적은 “시대는 다르지만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일맥상통한다. 향촌진흥에서 기층이 바로 전선이다. 나는 이 포부를 들판에 녹여내여 마을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실제적인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신화사 기자 공련강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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