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성 동쪽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에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한 포진의 예술형상 원형이 바로 기동항일근거지의 주요 창건자의 하나이며 팔로군 기동군분구 부사령원 겸 13퇀 퇀장인 항일영웅 포삼이다.

포삼은 본명이 조보삼이고 조한이라고도 불렸다. 1911년 7월, 섬서성 포성현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나 1932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청소년시기부터 반제, 반봉건 활동에 적극 참가하여 여러차례 체포되였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37년 3월, 포삼은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에 파견되여 공부하게 되였다. 7.7사변 후, 그는 연안에서 팔로군을 따라 화북 항일전선으로 달려가 진찰기항일근거지를 전전하며 싸웠으며 후에 33대대 총지부 서기로 있었다.
1938년 6월, 40여명을 거느리고 하북성 흥륭일대에서 항일유격구를 개척했으며 부대를 인솔하고 여러차례 전투를 벌려 일본군, 괴뢰군 수백명을 섬멸하고 총기 수백정을 로획했다. 1939년 4월 하순, 포삼은 부대를 지휘하여 일본헌병대 대좌 아까모또를 생포하여 일본군을 놀라게 했다. 같은 해 가을, 포삼은 기동군분구 부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포삼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했으며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다. 1940년 7월, 포삼은 부대를 거느리고 계현 백초와에 매복해있다가 일본군과 14시간 동안 격전을 벌려 일본 관동군 기병 정예부대를 전멸시켜 일본군의 기염을 크게 꺾었다.
1941년, 기동군분구에서 괴뢰군 치안대를 타격하는 작전이 시작된 후 포삼은 부대를 지휘하여 여러차례 전공을 올렸다. 그중 1942년 1월 연산구 과하연일대의 전투에서 포삼은 7개 중대의 병력으로 괴뢰군 1000여명을 사살해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기는 기적을 창조했다.
포삼의 이름은 기동일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사람들은 친절하게 그를 ‘포대장’, ‘포사령’, ‘포퇀장’이라고 불렀다. 괴뢰군은 포삼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고 슬그머니 포삼부대를 피해 다녔다.
포삼은 일본군, 괴뢰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지만 언제나 전투를 지휘하는 최전방을 지켰다. 1942년 2월 17일, 포삼은 부대를 인솔하여 하북 준화에서 일본군, 괴뢰군과 조우하게 되였는데 전투를 지휘하던중 불행하게도 적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희생되였다. 당시 나이가 31세였다.
포삼이 전투했던 곳에서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현재 하북성 석가장 화북군구렬사릉원, 천진 반산렬사릉원, 북경 평서렬사릉원 등지에는 모두 포삼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신화사 기자 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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