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 동영 리진현당위 당학교에 위치한 홍색리진교양체험쎈터 내부에는 조각상 하나가 있는데 방문객들은 조각상 앞에 멈춰서서 경의의 시선으로 조각상을 한참을 바라보군 한다. 가슴을 펴고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이 조각상은 바로 리진현에서 배출된 첫 중공당원이자 신화사 산동지사의 초대 사장이며 보도전선의 항일영웅인 리죽여의 모습이다.

“당의 보도사업일군으로서 리죽여는 ‘신문 한장이 포탄 한발보다 낫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살았다. 그는 여러 종류의 신문을 주최, 발행하며 필을 칼날로, 먹을 총으로 삼아 청춘과 생명으로 보도항전의 힘찬 선률을 써내려갔다.” 방문객들이 이곳에 올 때마다 해설원인 정결은 항상 감동적인 항일전쟁 렬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름날, 리진현의 황하 제방에는 초목이 무성하다. 제방 옆의 장과촌은 린근에서 유명한 문화마을이였고 리죽여는 이곳에서 태여났다.
20세기 20년대에 리죽여는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아 낮에는 책을 읽고 신문을 오려 붙였으며 밤에는 학생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신문을 읽어주고 시사와 진보적 사상을 들려주었다. 1925년 음력설에 리죽여는 자신의 집 대문에 ‘맑스레닌주의를 천하에 전하고 세계는 대동해야 한다.’는 대련을 붙였다. 이는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그의 기대일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평생을 싸운 그의 신앙이 되였다.
1927년, 리죽여는 제남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진보적인 청년들과 함께 《경진》 주간지를 창간했다.
‘사회를 방해하는 추악함을 숙청하고 사회를 미화시키겠다!’ 리죽여의 유물중에는 1929년 그가 남경중앙대학 법학원 정치학부에서 공부할 때 쓴 십여편의 일기가 있었다. 이는 그해 6월 24일 일기의 한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썼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실천했다.
9.18사변 후 그는 남경중앙대학과 남경 여러 학교의 사생들을 이끌고 항일구국운동에 참가했고 제남에서 《신아일보》를 창간하고 상해에서 《문화보》를 창간하는 등 여러 곳을 오가며 신문을 발행했으며 글로 항일구국의 불씨를 산천대지에 뿌렸다.
전 민족 항전이 폭발한 후 리죽여는 혁명의 성지인 연안으로 향했다. 그는 자기 짐은 거의 챙기지 않았지만 등사원지, 강판, 글씨를 새기는 철필을 지니고 다니며 <중공중앙선언>과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전단지로 인쇄하여 대중들에게 배포했다. 진동남에서 그는 팔로군 129사에 남아 민중동원사업에 참여했으며 《중국인보》를 창간했고 이후 《신화일보》(화북판) 부총편집을 맡았다. 1939년 5월, 그는 산동으로 전근되였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그는 여전히 보도사업을 매우 중시하며 중공중앙 산동분국 선전부장으로 있는 기간에 《대중일보》의 발행을 지도하고 신화사 산동지사 사장 등을 겸임했다.
당시 《대중일보》가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사 사업일군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였고 경험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리죽여는 편집와 기자 대오 건설을 직접 틀어쥐였다. 동시에 그는 계속해서 제남과 상해에서 신문을 운영하는 습관을 유지했으며 항상 직접 사설위원회를 주재하고 매주 적어도 한편의 사설을 발표했다.
1940년 1월, 물자 봉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을 때 한 신문사 동지가 초조하게 리죽여를 찾아와 말했다. “인쇄공장의 잉크종이가 급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리죽여는 평범한 유광지에 시선을 돌렸고 아무도 이런 종이로 신문을 인쇄한 적이 없어서 적의 검문이 비교적 느슨했다. “누구도 해보지 않았다면 우리가 길을 개척해보자!” 리죽여는 로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기계 옆에서 먹고 자고 기계의 압력과 잉크량을 반복적으로 조정하여 마침내 잉크 침투 난제를 극복하고 유광지의 뒤면에도 글자를 인쇄할 수 있게 했다.
“항전이 더욱 어려워진 오늘날, 기자는 보다 영광스러운 임무를 짊어지고 있다. 그는 선전전투의 최전선에 서있으며 단순한 선전가, 선동가 및 사회 교육자일 뿐만 아니라 조직자, 감독자 및 지도자가 되여야 한다.” 1940년 9월, 리죽여는 글 <영광스러운 력사와 영광스러운 임무>에서 이렇게 썼다.
1941년 6월 28일, 신화사 산동지사가 림술현(현재 림기시 관할현)에 설립되였다. 이는 신화사 국내 지사중 첫번째 성급 지사이며 리죽여가 지사장을 겸임했다. 당일 지사는 <팔로군의 습격에 적군과 괴뢰군 패주>, <청하구의 광범한 청년이 항일 초소로 몰려들어> 등 6편의 소식을 보도했다. 전쟁이 빈번하고 통신시설이 렬악하며 인력이 부족한 조건에서 신화사 산동지사는 대중을 선전하고 사기를 북돋우며 적을 타격하는 교량역할을 발휘했다.
언제 어디서나 리죽여는 자신의 초심과 사명을 잊지 않고 확고한 립장으로 중국공산당의 보도선전 전선을 확대하며 인민의 항전 결심을 확고히 했다. 1942년 늦가을 맞아 일본군이 기몽산지역에서 대규모 ‘소탕’을 벌였고 리죽여와 전우들은 산골짜기에 숨어 통신선로를 지키는 한편 내부 통신을 인쇄했다. 11월 2일, 고욕 돌파전에서 리죽여는 불행히도 총에 맞아 향년 37세 나이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력사는 끊임없이 흐르고 정신은 대대로 전해진다.
60세가 넘은 리죽여의 손녀 리효파는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깊은 영향을 주셨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인 리유민도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1946년 혁명에 참가했으며 《선봉보》, 《진군보》, 《인민전선보》, 《해방군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보도전선에서 앞장섰다고 말했다.
리효파는 “나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문집, 그 당시 운영했던 신문, 혁명 활동에 참가한 옛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가장 소중한 자산은 위대한 항전 정신이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집의 가보이다.”고 말했다.
오늘날 리진현의 리죽여렬사기념광장, 렬사릉원, 홍색리진교양체험쎈터 등 기념교양 장소에는 리죽여 렬사의 조각상이 조용히 서서 조국 대지의 나날이 새로워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올해 40세인 해설원 정결은 리진현당위 당학교의 고급 강사로 15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23년 홍색리진교양체험쎈터가 개관한 후 당학교 학원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필수 선택 과목이며 몰입형 체험을 통해 위대한 항전 정신을 느끼도록 한다. “전승은 불씨가 꺼지지 않게 하는 관건이다. 리죽여는 목숨을 바쳐 웅장한 보도전가를 써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해 항전이야기를 잘 전하고 홍색유전자를 이어가야 한다!”
신화사 기자 원민 왕홍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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