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아안시 로산현 악이금로에는 고풍스러운 사합원 한채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항일영렬 악이금의 생가이다.
악이금은 본명이 악이종이며 1914년 사천성 로산현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악이금의 부모는 자녀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소년 악이금은 항상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악비전》을 좋아했다. 가정교육은 악이금의 마음속에 애국의 씨앗을 묻었다.
9.18사변, 1.28사변이 잇달아 폭발하고 산하가 찢기고 민족이 위태로워졌다! 제로대학에 입학했던 악이금은 결연히 붓을 던지고 종군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봄, 악이금은 항주에 있는 견교중앙항공학교에 입학했다. 1936년, 악이금은 중국 공군 제4대대 22중대에 편입되여 분대장을 맡았다.
1937년 8월 13일, 송호회전이 폭발했다. 15일, 일본 해군 항공대가 견교공항을 습격하자 악이금이 소재한 제4대대가 출격했다. 이번 공중전에서 공군 제4대대는 모두 6대의 적기를 격추했는데 그중 악이금의 2204호 전투기가 4대를 격추했다.
같은 해 8월 21일 악이금은 전우들과 함께 명령을 받고 일본 항공대를 저격했으며 또 일본전투기 2대를 격추하여 중국 공군 력사에서 최초의 왕패 비행사로 되였다.
악이금의 전적은 한 때 전세계를 뒤흔들어 언론에 앞다투어 보도되였다. 사람들은 악이금과 대대장 고지항, 전우 류수강, 리계단을 중국 공군의 ‘4대 금강’,‘4대 천왕’으로 부르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37년 12월 3일, 남경이 함락되기 전 중국 공군에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전투기는 20대도 되지 않았다. 악이금은 결연히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으며 수십대의 적기와 대치하면서 악전 고투하다가 끝내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순국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3세였다.
현재 악이금의 생가에는 그의 생애 사적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는데 가족사진 한장이 유난히 눈에 띄인다. 해설원 송월열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37년초, 악이금은 집에 돌아가 설을 쇠면서 이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에서 악이금은 무릎을 끌어안고 웃으며 맨앞에 앉아있다. 이 사진은 그와 가족이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73세의 악근강은 장기간 의무해설원을 맡고 관광객들에게 큰아버지 악이금의 영웅사적을 이야기한다. 1952년에 태여난 악근강은 큰아버지를 만나보진 못했지만 늘 아버지로부터 큰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악근강은 “우리 악씨 집안은 충렬을 가훈의 첫번째에 놓고 있다.”고 말했다.
악이금이 희생된 후 그의 가족은 국민정부가 렬사에게 지급한 무휼금과 일부 가산을 기부하여 로산현 첫 현대 중학교인 사립 백영중학교를 설립했다. 1950년, 사립 백영중학교와 원 로산중학교가 로산중학교로 정식 합병되였다. 2025년 3월 하순, 악씨 후손들은 로산중학교를 참관하고 ‘악이금장학기금’을 설립해 학교 발전을 지원키로 했다.
로산중학교 교장 라국봉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사립 백영중학교는 ‘충용보국’을 교훈으로 하는데 이런 애국정신과 교육리념은 로산중학교의 유전자에 새겨져있다. 우리는 시종일관 영렬들의 정충보국 유지를 계승하고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유용한 인재를 양성할 것이다.
신화사 기자 당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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