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과 생명으로 불후의 공훈을 세운 곽정

2025-08-27 08:37:06

“곽정 동지가 부대를 이끌고 일본 괴뢰군과 끝까지 혈전을 벌린 영웅적인 사적은 리상과 신념에 대한 충성과 국가와 인민을 위한 사명에 대한 책임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웅장한 기개를 보여주었다. 그의 혁명정신은 우리들이 각자의 일터에서 굳건히 실천하고 용감하고 의연하게 나아가는 실제행동으로 전환하도록 격려했다.” 최근 강서성 길안시 태화현에서 개최된 이색적인 홍색이야기 강연활동에는 100여명의 간부와 대중들이 참여했는데 곽정 렬사의 사적이 소개되자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감동을 금치 못했다.

곽정.

곽정은 본명이 곽휘면이고 1914년에 강서성 태화현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토지혁명 전쟁시기 강서성 태화현에서는 농민운동과 혁명무장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곽정의 아버지 곽상구는 전에 사촌구 대강향 중국공산당지부 서기로 있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곽정은 아동단에 가입하여 혁명활동에 참가했다.

1930년 7월, 16세의 곽정은 강서서남 홍군간부학교에서 학습했고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10월, 곽정은 중앙홍군 주력부대와 함께 장정에 참가했으며 사업에서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임무를 적극적이고 견결하게 완수하여 준의회의 이후 제9군단 사령부 정찰통신과 과장으로 임명되였다.

1937년 1월, 곽정은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에 입학하여 학습했다. 그해 8월에 졸업한 후 팔로군 제120사 정찰과 과장으로 임명되였으며 군을 따라 산서 항일전선으로 갔다.

1939년 2월, 곽정 등 7명 간부는 하북성 중부 평원지역 무장 고사일의 5로군의 개편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출발하기 전 그는 동료들에게 “우리는 모두 장정을 겪어온 사람들이며 이번에 조직에서 나를 5로군으로 보내 개편하게 했다. 이는 새로운 장정을 시작하는 것과도 같다. 전진을 위해서 이름을 아예 곽정으로 바꾸어야겠다.”고 말했다.

곁에 서있던 사 정치부 주임 감사기는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좋다! 참말로 용기가 있군. 나는 이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1939년 4월 23일, 일본군은 하북성 하간현 제회촌을 포격한 후 진공을 개시했다. 팔로군 제716퇀 제3영은 마을 안에서 포위되였다. 제회전쟁중 제120사 독립 1려 참모장이였던 곽정과 려의 수장은 직접 전선에 나가 부대를 지휘했고 적의 여러차례의 공격을 물리치고 일본군 700여명을 전멸시키는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하룡 사장은 사 정치부 주임 감사기에게 “곽정의 공을 꼭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1939년 9월 25일 오전, 하북성 행당현 진장 전선에는 전쟁의 불길이 자욱했다. 정정, 무극, 행당, 령수 등지에 주둔해있던 1500여명의 일본 괴뢰군은 진찰기 항일근거지를 공격하는 통로를 열려고 했다. 일본군의 ‘우도자전술’에 맞서 곽정은 려의 수장을 도와 적들을 교묘하게 풍구리에 매복했다. 전투가 가장 치렬할 때 곽정이 지휘한 제2퇀은 반석처럼 굳건히 버티며 여러차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적군을 전멸시키는 소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사흘 밤낮으로 이어진 격전에서 1200여명의 적을 섬멸했으며 잔적들이 점령한 마지막 고지만 남았다. 29일, 해질녘 우리 군은 적군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고 격전에서 곽정은 흉부와 머리에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부상이 심해 25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진장전투에서 용감하게 목숨을 바친 민족영웅을 기리기 위해 려부는 주둔지에서 추도회를 열고 곽정의 유체를 하북성 행당현 진대촌에 안장했다.

비록 곽정은 겨우 25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전쟁의 불길이 자욱한 항일전장에서 피와 목숨으로 자신의 인생의 장을 썼다. 1985년, 곽정 렬사의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와 강서성 태화현 관조향(지금의 관조진) 대강촌의 송백나무 아래에 안장되였다. 2024년 6월, 대강촌은 4개 도로 건설 공사를 가동했으며 주민들은 곽정의 추진력과 인내심을 실천하며 한마음한뜻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4개월 후 새로운 시멘트 도로가 전부 순조롭게 개통되여 마을의 치부대로를 닦아놓았다.

올해 청명절 촌민 곽창송은 곽정 렬사의 묘지에 가 먼지를 쓸고 비석을 닦았다. 그는 묘비를 응시하며 “이 비석이 지키고 있는 것은 렬사의 충골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결코 꺾이지 않는 정신적 기둥이다.”라고 말했다.

  신화사 기자 진주좌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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