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 기자는 12.9운동의 주요 지도자이며 항일영웅인 동육화의 고향 호북성 기춘을 방문했다. 기춘현 육화중학교 교장 전신화는 “9월에 개학한 후 학생들이 직접 동육화 렬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정에 동육화의 정신을 따라배우도록 할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은 보다 깊이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육화중학교는 원래 사자초급중학교였으나 후에 렬사 동육화를 기념하기 위해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교문으로 수십메터 들어서면 오른쪽에 위치한 2층 건물이 바로 동육화혁명렬사사적진렬관이다.
동육화는 1907년 기춘현의 한 교원 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1924년, 동육화는 무한에 가 공부하여 무창 계황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 성적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5년에 5.30운동이 폭발하자 동육화는 무한에서 후원행동을 조직하고 학생을 조직해 시위하며 제국주의와 군벌의 폭행에 항의했다. 독군서 앞에서의 시위에서 그는 앞장서서 지휘를 맡았으며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어도 끝까지 지휘했다. 1925년, 동필무 등의 소개로 동육화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북벌전쟁기간 그는 고향 기춘으로 돌아가 교원으로 위장하여 농민협회, 녀성협회를 조직, 건설하고 농민 야학교를 설립하여 사당을 혁명 사상을 전파하는 교실로 바꾸었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동육화는 한동안 당조직과 련락이 끊겼지만 그의 혁명신념은 시종 사라지지 않았다. 1933년 그는 북평중국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당지부를 재건하고 지부 서기를 맡음으로써 이후 학생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화북사변 후 국민당정부의 타협과 양보에 직면하여 북평에서 12.9운동이 폭발했다. 1935년 12월 9일, 북평의 수천명 학생들은 거리에 나가 일본의 침략과 화북자치를 반대하고 국가 령토 완정을 수호할 것을 요구했다. 동육화는 서성구 청원 총지휘자로서 애국구호를 웨치며 학생대오를 거느리고 행진했다. 12월 16일, 그는 더욱 큰 규모의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했으며 수만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이에 호응했다.
“12.9운동은 민족의 각성을 크게 촉진하였으며 동육화를 대표로 하는 선진 지식인들은 당시 청년학생들의 본보기로 되였다.” 육화중학교 당지부 부서기이자 력사 교원인 진염은 학생들에게 이 력사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1936년, 학생운동을 조직한 원인으로 지명수배를 받게 된 동육화는 핍박에 의해 북평을 떠났다. 같은 해 5월, 그는 전국 학생구국련합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조직부장을 맡았다. 7월, 그는 천진으로 돌아가 통일전선 사업에 종사하면서 구국조직을 발전시켜 북평, 천진 각계 구국련합회 주석, 화북 각계 구국련합회 조직부장 등 직책을 력임했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자 동육화는 화북 각계 구국련합회를 화북 인민무장자위회로 개편하는 것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이후 화북무장자위위원회 위원이며 군사부장으로 임명되여 기동조직에 깊이 들어가 대중무장을 조직했다. 1938년 그는 왕중화라는 가명으로 고지원부 민중단을 재편성해 4만명의 분산되여있는 군대를 기동 항일련군으로 개편하고 정치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7월, 그는 화북을 놀라게 한 기동 항일 대폭동을 주도하여 창려, 란현, 락정 등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일본 괴뢰군의 보급 로선를 차단했다.
폭동 후 일본군이 미친 듯이 반격을 가하자 동육화는 부대를 거느리고 평서근거지로 전이했다. 옷과 식량이 부족한 추운 겨울날에도 그는 자신의 외투를 길 안내원에게 양보하고 분배받은 고기를 부상자들에게 가져다주면서 밤낮으로 적들에게 맞설 대책을 연구했다. 1938년 10월, 그는 170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봉쇄를 뚫고 평서근거지에 도착하여 혁명력량을 보존했다. 그 후 그는 기동항일련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중공기열찰구당위 비서장, 화북인민항일련군 사령원을 력임하며 평서와 기동, 평북의 군정 건설과 근거지 개척 사업을 책임졌다. 그러나 장기간의 고된 전쟁으로 피로가 쌓이고 페병이 악화되여 1939년 6월 하북성 래수현 봉두촌 군구병원에서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현재, 기춘현 사자진의 동육화 옛집은 그대로 보수되였고 흙벽돌집 안의 소박한 농가 진렬은 이 혁명가의 순수한 마음을 말해주고 있다. 육화중학교의 학생들도 렬사의 정신에 깊이 감화받고 있다. 전신화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학교는 매년 각종 기념활동을 개최하며 신입생들을 조직하여 력사 사적 진렬관을 참관하고 동육화의 옛집에 가 동육화를 기리며 글짓기 공모 등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아이들이 력사를 명기하고 선렬들의 유지를 계승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육화중학교 학생 하명원은 작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평화로운 년대에 성장한 세대로서 우리는 번영하는 시대에 태여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학습과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동육화 렬사를 본보기로 삼아 부지런히 배우고 과감히 책임지며 조국의 발전과 진보에 힘을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신화사 기자 공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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