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휘성 합비시 촉산렬사릉원의 푸른 소나무와 측백나무 사이에 청동 조각상이 조용히 서있다. 항일영웅인 채병염 장군의 시선은 80여년의 풍운을 뚫고 그가 목숨으로 지켜온 조국땅을 응시하고 있다. 붉은넥타이 해설원의 맑고 격앙된 목소리는 멀리서부터 가까이까지 울려퍼졌고 항전 전설들이 여전히 전해지고 있으며 조용히 놓여진 흰 국화꽃들이 새로운 추모의 뜻을 전하고 있다.

1902년, 채병염은 하북 동교 호천촌에서 태여났다. 서당 창살 사이로 새여드는 해살이 소년 채병염의 몸을 비추었다. 그는 량계초의 《음빙실 문집》을 즐겨 읽었고 ‘국가의 흥망성쇄에 나도 책임이 있다.’는 웅대한 포부를 세웠다. 17세에 학교를 중퇴했을 때 비록 그의 몸은 시골에서 교육사업에 얽매여있었지만 나라를 구하려는 씨앗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1924년, 채병염은 옛 동맹회 회원이자 외삼촌인 등자운의 인솔하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구국구민’도 그의 마음속에 더욱 깊이 새겨졌다. 졸업 후, 채병염은 혁명의 새로운 력량이 되여 국민혁명군을 따라 동정, 북벌하며 13년 동안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였고 이때 채병염은 국민혁명군 륙군 제18군 67사 201려 소장 려장이 되였다. 8월 13일, 송호회전이 시작되였고 채병염은 ‘군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라를 위해 죽지 못할가 봐 두렵다!’라는 지원서를 썼다. 그는 5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밤새 달려가 후세 사람들이 ‘피와 살의 방아간’이라고 부르는 상해 로점전장을 지원했다. 8월 26일 새벽 3시, 채병염은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주력이 도사리고 있는 육가택을 향해 돌진하였으며 ‘본 려의 장병들은 진지와 함께 멸망할 것을 맹세한다. 전진하는 자는 살고 후퇴하는 자는 죽는다. 모두 이 말을 꼭 지켜야 한다.’라고 웨쳤다. 일본군과의 치렬한 전투에서 그는 여러발의 총알을 맞고 향년 35세 나이로 장렬히 순국했다.
군대를 이끌고 상해로 가는 도중에 채병염은 당시 안휘성의 수부도시인 안경에서 안해 조지학과 자녀들을 배에서 내려주며 작별 인사를 할 때 안해에게 “당신은 자녀를 잘 돌보는 것외에도 녀성 항일구국 단체에 참여하여 국가를 위해 힘을 보태야 한다.”고 당부했다. 극히 잔혹한 송호회전에 직면하여 채병염은 8월 21일부터 22일까지 여러통의 편지를 집에 보냈으며 그 편지에는 안해와 자녀에 대한 따뜻한 정이 담겨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결별의 의미도 있었다. 안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국난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라도 지킬 수 없는데 가정이라구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4일 후, 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가서는 절필이 되였다.
채병염이 희생된 후, 국민정부는 그에게 륙군 중장으로 임명했다. 1985년 안휘성인민정부는 채병염을 혁명렬사로 추가 인정하고 그의 령구를 이듬해에 합비시에 이장했다. 2014년 9월, 채병염은 민정부에서 공포한 제1진 항일 영렬과 영웅 명록에 포함되였다.
채병염이 희생될 때 갓 돌이 되였던 아들 채절생은 세월이 흘러 2018년 청명절에 마침내 아버지에게 81년 만에 답장을 썼다. “항일전쟁이 승리했습니다. 오랜 시련을 겪은 중화민족은 일어서고, 부유해지고, 강해지는 력사적 도약을 이루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가 대신 지켜보았습니다!”
채병염을 기리기 위해 합비시정부는 채병염 생가 근처의 도로를 ‘병염로’로 개명했다. 이 차들이 많고 고층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끝자락에는 수많은 선렬들의 기대가 담긴 ‘부흥로’가 있다. 오늘날 이곳은 홍색유전자를 전승하는 중요한 지리적 상징으로 되였으며 청소년들은 이곳에 와 렬사의 사적을 듣고 현지 중소학교도 채병염의 가서를 사상정치 수업에 융합시켜 가족과 국가에 대한 애정을 깊이 심어주고 있다.
채병염의 ‘나라를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며 가정을 사랑하는’ 가훈은 후손들이 실천하며 전승했으며 고향 인민과 젊은 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법을 준수하고 청렴하고 자률적이며 열심히 일하고 사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채병염의 아들 채절생이 한평생 지켜온 신념이다. 2023년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종종 현지 중소학교, 사회구역 공익수업을 통해 항전 이야기를 학생과 대중들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정신적 영향을 깊이 받아 뜻깊은 일을 했을 뿐이다.” 2023년, 채병염의 손자 채문혁은 병염로 옆에서 깊은 강물에 뛰여들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다. 지나가던 시민이 촬영한 영상을 보고 네티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의 신분을 알게된 후에는 채병염 장군의 정신의 전승에 큰 감동을 받게 되였다.
‘어려서부터 뜻을 품었고 뛰여난 재주가 있다. 동정, 북벌에서 여러차례 공을 세웠다. 왜구에 맞서 나라를 구하고 송호전역에 피를 뿌렸다. 강회와 황포의 걸출한 인재이다. 촉릉에 영원히 잠들었지만 력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채병염의 묘지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묘지명을 오래도록 응시했을 것이다. 송호의 봉화는 이미 사라졌지만 채병염 장군이 피와 생명으로 써 내려간 대의는 마치 불멸의 불씨처럼 대대로 전해져 앞길을 밝게 비추어줄 것이다.
신화사 기자 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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