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에서 피 흘리며 국문을 지킨 애국장령 류수인

2025-10-21 08:40:08

귀주성 안순시제1고급중학교의 교사관과 교수청사 복도에는 선렬들의 사적이 인쇄된 홍보 전시판이 많이 걸려있는데 1942년 운남─미얀마 항일 전선에서 희생된 류수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류수인은 1905년 귀주 안순에서 태여났으며 1926년 4월부터 1927년 8월까지 황포군관학교 제5기 보병과에서 공부했다. 항일전쟁기간 그는 선후하여 보정 전역, 대아장 전역, 장사 전역, 곤륜관 전역 등 일련의 전역에 참가하여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다

곤륜관 전역에서 중국군대는 일본군과 세번의 반복적인 쟁탈전을 치렀으며 전투는 매우 치렬했다. 14일간의 치렬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구당 방향으로 도주했고 중국군대는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가 끝난 후, 류수인은 정식으로 국민혁명군 제5군 200사 599퇀 퇀장으로 승진했다.

1941년 봄, 200사가 명을 받고 안순 휴정지로 조정되자 고향을 떠난 지 10여년이나 된 류수인은 군대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2년초, 류수인은 고향의 녀성과 결혼했지만 신혼이 얼마 지나지 않아 200사가 명령을 받고 미얀마로 원정을 떠나게 됐다. 류수인은 군대를 따라 출정하다 보니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 떠나기 전, 그는 사복을 입고 안해, 형수와 함께 사진을 찍었고 이 한장의 사진이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기념이 되였다.

1942년 3월초, 원정군의 선두부대로서 200사는 미얀마 남부의 작은 도시 동고에 진입하여 원래 주둔했던 영국군의 방위를 이어받았다. 동고는 앙광에서 260킬로메터 떨어져있어 도로, 철도, 수로의 요충지이자 도시 북쪽에 군용 비행장이 있어 전략적 위치가 매우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동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200사는 일본군에 포위된 영국군의 한 장갑부대로부터 구조 요청을 받았다. 류수인은 부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일본군을 일거에 격파하고 영국군을 포위에서 성공적으로 구조했다. 이로써 중국군대는 미얀마에서 치른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시작된 동고 보위전에서 200사는 12일간의 치렬한 전투 끝에 800명의 희생으로 일본군을 20여차례 격퇴했으며 4000여명의 적을 섬멸하고 400여명의 적을 포로로 잡아 국가의 위상을 떨쳤다.

그 후, 200사는 당길전투를 겪었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련합군의 협력이 미흡하고 지원이 부족하여 전장에서 철수하여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5월 18일, 200사가 랑과지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에 매복되였고 류수인은 불행히도 향년 37세의 나이로 희생되였다.

항전이 끝난 후 류수인은 남경 국민정부로부터 륙군 소장계급을 추서받았다. 2015년 민정부는 제2진 600명의 유명한 항일영웅과 영웅집단 명단을 발표했는데 그중에는 류수인이 포함되여있었다.

귀주성서류관에는 ‘항일전쟁중의 귀주’ 주제 전시가 항상 개방되여있으며 류수인 등 항일장군의 사적이 하나하나 적혀있다. 귀주성서류관 2급 순시원 한문은 영렬들의 사적을 료해함으로써 력사를 명기하고 평화의 소중함을 알게 되였다고 말했다.

안순1중은 류수인과 기타 선렬들의 사적을 통합하여 학교 내부 교재를 편찬하고 학교수업을 개설했다. 부교장 성요에 따르면 매년 예술절이면 학교는 학생들에게 시, 산문, 연극 또는 무용을 통해 영웅의 이야기를 보여주도록 호소하여 애국주의교양을 전개한다.

해마다 운남성 등충의 국상묘지를 방문한다는 류수인의 조카 손녀 류청은 그곳에서 민족정신의 강렬한 공명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평화의 소중함을 더욱 잘 인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화사 기자 정명홍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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