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를 조국에 바친 동린각

2025-10-21 21:18:50

북경시 서성구 동린각로 북쪽 입구에는 한 점의 회중시계 조각상이 조용히 우뚝 서 있다. 이 조각상은 구리를 주요재료로 하였으며 상단에는 두 점의 기린이 조각되여 있다. 회중시계의 시계바늘은 항일 영웅 동린각 장군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간(1937년 7월 28일 오후 2시 30분)에 멈춰있는데 이는 전민족 항일전쟁이 폭발한 이후 나라를 위해 순국한 첫번째 고위급 장령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동린각은 1892년 10월 하북성 고양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8국 련합군이 침략한 후 어린 시절의 그는 국가의 굴욕과 인민의 고난을 직접 목격하면서부터 군인이 되여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풍옥상 부대에 참가하여 초병이 되였다. 용맹하고 전투에 능하며 병사를 잘 다루는 능력으로 인해 선후하여 련장, 영장, 퇀장, 려장으로 승진했으며 호국전쟁과 북벌전쟁에 참여했다. 1933년 동린각은 장성전역에 참가하여 희봉구 대첩을 거두었다. 같은 해 그는 풍옥상 등과 함께 챠하르 민중 항일 동맹군을 조직하여 선후로 강보, 보창,  고원, 다륜 등 잃었던 땅을 수복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 후 북평 향산으로 퇴거했다.

1936년 동린각은 국민혁명군 륙군 제29군 부군장으로 임명되였다. 당시 형세는 극도로 엄준했으며 북평의 서남부 지역만이 제29군의 방어지대로 남아있었다. 제29군 작전 부대가 전면적으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여전히 ‘평화’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장병들을 신속히 각성시키기 위해 동린각은 시국을 깊이 분석한 후 ‘중일 전쟁은 피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군사 훈련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그는 감정을 담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앙이 만약 항일을 명한다면 나는 반드시 몸소 앞장 설 것이다.”

동린각은 이렇게 말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개 행동했다. 1937년 7월 7일 전민족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그는 전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만약 일본군이 쳐들어 온다면 견결히 맞서며 로구교와 생사를 같이 해야 한다.

일본군의 전투기가 늘 저공비행하고 포성이 하늘을 뒤흔들며 전세는 매우 위급했다. 동린각은 안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큰 적이 눈앞에 닥쳤으니 효도를 충성으로 바꿀 때가 되였다” 고 말하며 안해가 자신을 대신해 부모님께 효도할 것을 부탁했다. 그 뒤로 그는 단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7월 28일 일본군은 남원 수비군의 병영을 폭격하기 시작했고 남원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였다. 동린각은 남원이 함락되면 일본 침략군이 곧장 북평 성내로 쳐들어올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군의 10만이 넘는 병력과 수십 대의 땅크를 상대로 그는 여전히 최전선에서 직접 장병들을 통솔하고 완강히 저항했다. 동린각이 부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던 중 갑자기 일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미친듯이 사격을 가했다. 동린각이 다리에 총알을 맞자 장병들은 물러나 치료를 받을 것을 권했지만 그는 “개인의 안위는 작은 일이지만 적을 막는 일은 큰 일이다”고 말하면서 고통을 참고 계속해서 지휘를 이어갔다. 전투기가 다시 급강하며 포탄 한 발을 떨어뜨렸고 동린각은 불행이도 머리를 적중하면서 향년 45세의 나이로 조국을 위하여 장렬히 희생되였다.

1938년 모택동은 연안에서  항적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위한 추도대회에서 동린각 등에 대해 “전 중국인민에게 숭고하고 위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1946년 국민정부는 동린각에게 성대한 국장을 거행하고 북경 서성구의 한 거리를 그의 이름을 따서 ‘동린각로’로 개명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이후 동린각을 혁명 렬사로 추인되였으며 2009년에는 새 중국 창립에 뚜렷한 기여를 한 영웅 모범 인물 100명 중 한명으로 선정되였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이래 북경 향산에 위치한 동린각장군기념관에는 젊은 방문객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기념관의 방명록을 펼치면 서로 다른 글씨체이지만 똑같은 경의를 표달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가득했다.  “선렬의 유지를 따라배우고 곤난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북경리공대학부속소학교 학생. “그의 용맹과 의지는 불꽃과 같고 그의 충혼은 뭇별과 같다”─대외경제무역대학 학생. “당신들이 아직 다 걷지 못한  길을 우리가 이어가겠다”─북경시 풍대구 가원소학교 학생…

기념관 판공실 사업일군인 최초영은 “해마다 1만여명의 방문객이 찾아와 항전 력사를 돌이켜보고 동린각의 동상을 첨앙하며 그의 생가를 참관하고 영웅의 정신 력량을 얻어간다”고 말했다.

오늘날 북경 향산의 언덕에는 동린각이 직접 재배한 대추나무가 여전히 높이 자라고 있다. 동린각의 이름으로 명명된 북경시 동린각학교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랑랑하고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영웅은 마치 단한번도 떠난적이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가 깊이 사랑한 이 땅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신화사 기자 류양 오문허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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