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북춤, 그곳에 ‘아리랑꽃’이 피였네

2024-03-04 08:03:19

무용극 <풍년제>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강해룡(가운데). (자료사진)

듣고 보니 생판 낯선 이름은 아니였다. ‘앉은북춤’이라니 뭔가 대뜸 눈앞에 훌쩍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웬 북소리가 금방 하늘에서 새처럼 날아내릴 듯한다.

앉은굿, 무당이 자리에 앉아서 손으로 연신 북을 쳐 둥둥 소리를 낸다. 절주 있는 장단은 마치 누구에게 뭔가 절절히 호소를 하는 듯하다.

북소리가 또 울린다. 이번에는 동네 큰 마당의 굿판이 아니다. 어느 팔간집 온돌 우의 놀이판이다.

큰 명절 때면 동네마다 한결같이 펼쳐지던 풍속도이다. 이웃집 아저씨가 온돌방에 책상다리를 하고 북장단을 치면서 가락과 더불어 연신 어깨춤을 들썩인다. 악기는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넣고 거기에 풍덩 엎어놓은 조롱박 바가지이다.

“어절씨구 하고 아낙네들이 버들처럼 한들한들 춤추고 쿵당쿵당 하고 나그네들이 노루처럼 뜀박질을 했습니다. 요란한 법석에 온돌이 땅에 막 꺼지기도 했지요.”

무형문화유산 ‘앉은북춤’ 종목 주급 전승인 강해룡 무용수. (자료사진)

앉은북춤은 그렇게 물바가지와 흥겨운 장단으로 강해룡의 해맑은 눈동자에 첫 영상을 남겼다. 그가 앉은북춤의 전승인이 되고 앉은북춤을 무대에 올리고 앉은북춤을 대학교의 교재로 삼은 것은 그로부터 또 한참이 지난 세월이였다.

사실 음악사전의 어디에도 ‘앉은북춤’의 이름은 없다. 그래서 처음 이 악기의 이름을 접하는 음악인들은 ‘반고무(盘鼓舞)’에 나오는 반고의 일종인 줄로 착각하기도 한다. 반고무는 중국 초나라의 사당춤에서 비롯된 무용이다. 무용인은 소반이나 북 우에서 뜀박질을 하며 발을 굴러 절주 있는 북소리를 낸다. 이 과정에 무용인은 또 여러 고난이도의 춤을 춘다. 반고무는 한나라 때 상류층이 연회에서 좌중의 흥을 돋우던 인기 무용종목이였다. 반고무는 언제부터 시작되였는지 모른다. 한나라는 초나라지역의 류방이 세웠고 류방이 초나라 가무를 즐겼기 때문에 한나라의 가무에는 반고무를 망라하여 상당부분 초나라의 색갈이 비끼게 되였다.

반고무이든 앉은북춤이든 다 강약 장단의 절주 있는 북소리 그리고 이에 따른 춤으로 즉흥적인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음악표현은 기실 왕조시대를 지나 수천년 전의 부족시대에 거슬러 올라간다.

무속이 인간의 시초와 함께 했다면 북, 방울, 피리 등은 인간 시초의 악기였다.

앉은굿이든 선굿이든 옛날에는 ‘령신무(領神舞)’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춤에 대해 알고 있는 김성찬은 무당이 이 춤으로 신령을 부르고(招喚) 인도(領喚)한다고 말한다. 김씨는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의 출생으로 어릴 때 조부의 가르침으로 령신무에 대해 알고 있었다. 20여년 전, 구순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직접 춤무령계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날 할아버지의 체력은 상상을 초월하던데요. 빠른 절주로 장장 여섯시간을 뛰였습니다. 가운데 드문드문 멈춰서서 그때마다 물로 목을 약간 적셨을 뿐이였습니다.”

김성찬은 연신 감탄을 했다.

신기한 춤사위는 금세 타임머신을 타고 태고시대로 떠나고 있었다. 신화시대의 황제와 치우가 눈앞에 구름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북은 팔각모양으로 되여있는데 팔신고(八神鼓) 혹은 팔신심(八神心)이라고 부른다. 북을 사슴가죽(지금은 소가죽)으로 만든다면 북채는 뽕나무의 고갱이로 만든다. 뽕나무숲의 상림(桑林)은 옛 제사용의 악무를 뜻하며 그 제사이름을 지칭하기도 한다. 상림지설(桑林之說)은 부족시대를 지나 상(商)나라에 지속되며 또 춘추(春秋)시기까지 이르고 있다. 상나라 때 탕왕(湯王)은 7년 가뭄이 계속되자 상림(桑林)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춘추(春秋)시기 묵자(墨子)는 상림(桑林)에서 성대한 제사활동을 벌리는 것이다…

“우리 조선족의 3박자 음악은 그처럼 상고시대부터 시작되였을가요?” 무용인 손룡규는 이야기 도중에 이렇게 자문하듯 말한다.

손룡규는 북경무용학원 교수로 국가급 무용상을 수두룩이 받은 무용계의 거목이다.

강해룡 역시 조선족의 피 속에 분명히 특유의 3박자 절주와 흐름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연변가무단 무용부 국가 1급 배우이자 교원이고 또 연변예술학원 무용학부 객좌교수로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선족의 음악에는 바다물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썰물처럼 물러가듯 남다른 절주와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끊어지듯 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파도를 방불케 한다.

“한족춤이 양걸(秧歌)춤이라면 조선족 춤은 아리랑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춤을 출 때 호흡과 절주의 흐름이 전혀 달라요.”

그래서 강해룡은 학생에게 ‘앉은북춤’을 가르칠 때 무척 힘들다고 말한다.

“‘앉은북춤’은 박자와 장단에 흥이 녹아있어야 합니다. 춤이 함께 하는 거지요. 북장단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춤을 출 줄 알아야 합니다.”

가락이 다르니 고수(鼓手)의 춤동작이 같을 수 없다.

“‘앉은북춤’은 한국에도 없고 조선에도 없습니다.” 강해룡은 ‘앉은북춤’이 우리만의 ‘춤’이라고 말했다. “밭머리나 온돌 우의 흥겨운 북장단, 춤놀이입니다. 무대공연에 익숙한 한국이나 조선에 이런 음악이 생길 수 없지요.”

조선족은 앉으나 서나 노래요,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음악의 바다는 파도처럼 멈출 줄 모른다. 세월 속에서 이주민의 고달픔과 즐거움이 ‘앉은북춤’에 눅눅히 스며들었고 판소리와 농악무의 음악이 ‘앉은북춤’에 그대로 젖어들었다.

‘앉은북춤’은 나중에 연변예술학원 교수 한룡길에 의해 발굴되였다. 그는 또 정규적인 교수를 통해 강해룡에게 ‘앉은북춤’을 전수했다.

강해룡은 이름난 ‘춤군’이였다. ‘앉은북춤’의 고수는 바로 이런 ‘춤군’을 절실히 필요한다.

사실 강해룡은 처음에는 노래를 즐겼다고 한다. 시골의 밭머리 무대에 올라서서 불렀던 그 당시의 경전적인 노래 <금빛태양이 온누리를 비추네>는 4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귀가에 쟁쟁하다. 모내기나 가을철이면 창가(唱歌, 노래)반 어린 학생들은 밭머리에 나가서 노래를 했고, 그러면 생산대에서는 그들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봉지로 선물했다. 그후 강해룡은 중학교 예술반에 입학하였으며 이때는 또 무용을 시작했다.

연변예술학교(연변예술학원 전신)에서 학생모집 입학시험 통지를 내렸다. 수험생 30, 40명이 입시에 참가했다. 종국적으로 남녀 각기 9명 정도 시험에 통과했다.

“그때 시험관이 한룡길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후날 우리의 무용반 담임교원도 그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강해룡의 말이다.

1988년, 강해룡은 예술학교에 입학한 후 한룡길에게서 북을 치는 기법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졸업한 얼마 후 강해룡은 연변의 인기종목이였던 춤 ‘삼로인’의 주역으로 되는데, 이때 그의 작은 북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러고 보면 시초부터 ‘앉은북춤’과 그 무슨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듯하다.

에피소드가 있다. 무용인 손룡규는 이때 ‘춤군’의 또 다른 발굴자로 등장한다. 연변예술학원 창립 30돐 기념행사를 하면서 손룡규의 명작 무용 <바다의 노래>를 무대에 올리기로 되였는데, 나중에 주역으로 강해룡이 선발되였던 것이다. 그때 강해룡은 연변예술학원 2학년 학원생이였다.

“무용 교원과 학생들이 다 강당에 쭉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요, 제일 뒤쪽에 서 있는 저를 앞줄에 불러내는 겁니다.”

강해룡은 오늘도 그날의 흥분을 쉽게 삭일 수 없는 듯했다. 무용교원 2명, 학원생 1명을 선정하여 따로 춤동작을 연습했다. 며칠 후 최종 1명으로 강해룡이 <바다의 노래> 배우로 선발되였다. 이 무용은 이름처럼 파도의 연연한 흐름 같은 리듬으로 유명하며 일반 무용인으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동작으로 정평이 나있다.

춤에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낸 강해룡은 그후 또 ‘전국소수민족문예회보공연’, 대형 음악무용극 《천년아리랑》, 평양국제예술축제 등 해내외의 큰 공연에 주요배우로 참석하여 1등상, 금상, ‘우수배우상’, ‘우수종목상’ 등 메달을 두둑이 받아와 ‘춤군’의 뛰여난 기질을 자랑했다.

무용극 <아리랑꽃>에 출연한 강해룡의 4살 아들. (자료사진)

언제부터인가 강해룡은 ‘앉은북춤’의 대명사로 되였다. 그가 창작한 ‘앉은북춤’은 ‘단오절’, ‘농악무’, ‘중추절’ 등 대형 경축행사에서 뭇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중앙텔레비죤방송 제3채널의 종목 ‘무용세계’의 초청을 받아 무용 ‘앉은북춤’으로 선후하여 두번이나 중앙텔레비죤방송 무대에 올랐다.

‘앉은북춤’은 종국적으로 연변예술학원 무용교재의 과목으로 되였다.

“무용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남자춤은 아주 드뭅니다. 수박춤의 엇박자 절주 등의 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앉은북춤’은 온돌방에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무릎을 탁치면서 “어좋다, 좋지”하고 외치는 우리의 군상을 눈앞에 떠올리게 한다.

엇박자의 3박자와 2박자 절주는 지금은 교재에 사용되고 있다. ‘안무 절주의 과목’이라고 명명된 이 절주는 손룡규가 무용배우들의 좌우 뇌의 반응과 개발을 위해 만든 것이다. 절주는 음악의 구조를 이룬 기본요소로 선률의 기둥이다.

“3박자와 2박자의 엇박자 절주는 먼저 4분의 3 박자인데요. 한소절에 3박자 있습니다. 후자는 4분의 2 박자인데요. 한소절에 2박자 있습니다. 행군절주이지요. 이어 신체언어를 영입합니다.”

여기에서 기어이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손룡규가 이 행군절주로 강해룡 그리고 그의 두 오누이자식의 음악천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춤이라군 배운 적 없다는 세살짜리 아들애와 여섯살짜리 딸애가 엇박자의 이 절주를 그렇게 잘 따라하는 겁니다.”

아닐세라, 강해룡의 딸은 뒤미처 무용에 입문하였고 아들은 이듬해인 네살 때 벌써 무대에 올랐다. 아들애가 제일 나이 어린 무용배우로 출연한 음악무용극 <아리랑꽃>은 제5회 전국소수민족문예회보공연에서 금상을 받은 정품 작품이다.

“무용극은 북경 공연 후 한달 동안 각 지역에서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애의 공연비가 춤군인 나보다 더 많은 겁니다.”

제2세대의 ‘앉은북춤’ 전승인은 벌써 하늘 아래에 또 ‘아리랑꽃’을 피우고 있었다.

  신연희 기자/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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