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어둠을 밝히는 빛□ 김은희

2024-04-18 08:52:02

오래동안 어머니나 할머니, 오래전 이 땅에 살았던 녀성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은 작자의 소망을 적은 책이 있다. 바로 한국 작가 최은영의 첫 장편소설《밝은 밤》이다. 이 소설은 4세대 녀성의 우정, 항쟁, 눈물과 웃음을 담은 한편의 녀성판 ‘인생작’이다.

32살의 주인공 지연은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홀로 바다가 마을인 ‘희령’으로 떠난다. 남편과 리혼하고 자기를 배신했다는 충격에서 쉽사리 헤여나오지 못하던 그는 도망치다싶이 이사를 결심한다. 그곳에서 여러해 동안 보지 못했던 할머니를 만난다. 어색함과 침묵 뒤에 외로운 마음이 조금씩 다가와 할머니와 지연이는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는 친구가 된다. 할머니 댁의 오래된 사진첩에서 지연은 생김새가 자기와 비슷한 한 녀자가 소녀시대의 할머니 옆에 기대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지연이의 증조할머니이다.

할머니로부터 듣는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의 이야기는 지연의 호기심과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힘을 전달해준다. 증조할머니는 백정의 딸이라는 리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에게 괄시와 무시를 받으며 힘든 시간을 살다가 어쩌다 량민의 자식인 증조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였는지, 어떤 삶을 살아내며 이곳 희령으로 오게 되였는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 소설은 지연이가 희령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나가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와 할머니에게서 전해 듣는 과거 시점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이 이야기의 특별한 점은, 과거의 이야기가 할머니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풀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에게서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연이가 재구성한 것이라는 데 있다. 즉 193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증조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현재의 자기에 이르기까지 백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연이 자기의 시점에서 꿰여나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두 이야기의 시간을 오가며 사진과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던 오래전 사람들을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그들을 현재에 다시 살려낸다.

“너는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앞으로는 내가 너를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리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리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

하나하나의 생생한 얼굴은 점차 한장의 흑백사진에서, 한통의 감동적이고 깊은 편지에서… 증조할머니, 할머니 그리고 엄마를 거쳐 도착한 이야기, 그녀들의 인생이 눈앞에서 재현된다.

《밝은 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간의 흐름과 이야기의 힘을 통해 사랑과 사랑으로 변화되는 마음을 다룬 감동적인 소설이다. 과거와 현재를 아름답게 어우르며, 이들의 이야기를 빌어 독자들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렇게 나에게로 삶이 전해지듯 지금의 나도 그들에게 닿을 수 있을가. 과거의 무수한 내가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 듯 지금의 나 또한 과거의 수많은 나를 만나러 갈 수 있을가?

엄마와 할머니의 입을 통해 듣는 “옛날 옛날에”는 은은하며 강인한 존재감으로 서서히 주위를 밝게 감싸는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와 공감을 자아낸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해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이 소설에 깊은 감명을 주는 부분이 많은데 특히 이 부분이 소름이 돋는다. 작가의 감정을 오롯이 보여줄 수 있는 상상력과 문장력 그리고 섬세함에 어느새 감탄하게 된다.

소설에는 또 “어깨를 빌려준 녀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혈연이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여주는 일종의 ‘돌봄 가족’이 가부장 부계가족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어둡기만 했던 밤이 밝아오는 리유이다. 그의 소망 대로 그의 소설은 국경을 넘어 그런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도착해 생명력을 얻고 있다.

작자의 필치는 랭정하고 깊고 섬세하다. 4대의 녀성들이 장장 백년에 걸쳐 그려낸 시간축에서 그는 영화처럼 진실하고 립체적인 캐릭터를 잘 그려내고 있다. 새비 아줌마, 명숙  할머니, 희자, 지연이라는 인물들을 허구의 공간에 놓기 어렵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진실하고 간절하게 살아온 너 혹은 나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인생이 긴 밤이라면 그 긴 인생길을 밝혀주는 것은? 나는 그것이 틀림없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매 녀성 사이의 도움과 우정, 어두운 순간에도 결코 놓지 않는 손과 따뜻한 품, 비바람 속에서도 끄떡 없는 편지와 그리움, 죽어서도 풀어줄 수 없는 소소한 망설임과 상처, 바로 이 미약하지만 서로 구원할 수 있는 빛은 대대손손 혈맥으로 하여금 시간의 무게를 짊어지게 한다.

  이 작품은 중국 최대 콘텐츠 리뷰 사이트 ‘두반’의 지난해 ‘2023년 올해의 책’ 2위에 오른 적 있다. 백년의 시간을 감싸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 “선명한 캐릭터와 잘 짜여진 이야기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독자에게 스며들어 사회 이슈를 성숙하고 깊이있게 다루었다.”는 평가와 함께 4대의 삶을 비추며 시간과 공간을 방대하게 아우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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