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걸출한 무산계급음악가이며 ‘군가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정률성 탄생 110돐 기념행사가 유엔에서 선정한 음악도시 흑룡강 할빈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였다.
정률성의 본명은 정부은(郑富恩)으로 1914년 8월 13일 조선반도의 혁명가정에서 태여났다. 후에 이름을 ‘률성(律成)’이라고 고쳤는데 이름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뜻이 내포되여있다.
정률성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섭이, 선성해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출한 인민음악가로 칭송되고 있다. 1938년 5월 24세의 정률성은 자신의 첫 대표작인 <연안송>을 창작해 이름을 날렸고 같은 해에 또 <팔로군행진곡>을 창작했다. 이 노래는 후에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개명하였는데 1988년 중앙군위 명령에 의하여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지정되였다. 1976년 12월 7일 정률성은 북경에서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팔보산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정률성의 딸인 정소제가 밝힌 데 의하면 정률성은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팔로군총부의 6호 명령에 따라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건너갔다. 그는 조선에서 수차례 공화국 모범로동자 영예도 받았다. 1949년 새 중국이 설립되자 당시 중국인이였던 그의 부인 정설송이 주은래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귀국을 요청했다. 그의 요청은 주은래 총리의 회답을 받았고 김일성 주석의 비준을 거쳐 1950년 그들 부부는 정식으로 중국으로 돌아왔으며 당해에 정률성은 중국 국적에 가입했다.
정소제 녀사는 “아버지의 평범하지 않은 경력이 오늘까지도 중국과 조선, 한국 인민들 모두가 그를 기념하는 원인”이라고 말했다. 또 “아버지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뜻은 영원히 존재한다.”면서 그가 창작한 <우의평화진행곡>에서 노래한 것 처럼 전쟁을 반대하고 동아시아의 평화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자고 호소했다.
2009년 정률성은 중앙 선전부, 조직부, 통전부와 해방군 총정치부 등 11개 부문에서 련합으로 평의선정한 ‘새 중국 창건에 뛰여난 공헌을 한 100명 영웅모범인물’에 선정되였다.
CCTV 사회자인 경일단은 이날 무대에 올라 정률성이 50년대에 흑룡강성 대흥안령에서 창작한 ‘흥안령에 설화꽃이 날리네’를 랑송해 행사분위기를 고조로 이끌었다.
연안혁명기념관 당위 서기이며 관장인 류니, 국방과학기술대학 왕리홍 교수, 할빈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 당조 서기이며 국장인 왕홍신, 중국교향악단 당위 서기 주우가 기념행사에서 발언했고 중국문련 당조 성원이며 서기처 서기인 서영군과 문화및관광부 당조 성원이며 부부장인 로영천이 좌담회 총화발언을 했다.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정률성의 예술인생에 대해 극찬했고 그의 모든 작품은 중화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 할빈시조선민족사업촉진회와 연변작가협회, 연변인민출판사, 연변대학 예술학원 대표들도 좌담회에 참가했다.
이번 행사는 문화관광부, 중국문련,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에서 주최하고 중국음악가협회, 중국교향악단, 할빈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에서 주관했다.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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