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규억, ‘건축왕’으로부터 민간문화예술인으로

2024-09-18 09:07:33

훈춘에서 대표적인 건물을 가장 많이 세운 사람으로 알려진 채규억(72세)이 황혼인생을 민족문화사업에 바치고 있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채규억은 예술가가 꿈이였지만 문화대혁명기간 아버지가 투쟁받는 바람에 고중진학 기회도 참군할 기회도 다 잃고 말았고 농촌에서 숨죽이고 살았다. 아버지의 문제가 해결돼서야 그는 많은 사람들이 꺼려했던 삼가자향 건축대 벽돌 운반공으로 되였다.

“그때만 해도 저는 건축사로 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잘살아보려고 열심히 심부름하고 열심히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요절된 꿈을 가슴에 안고 가장 어려운 로동환경에 투입되였던 그때를 떠올리면서 채규억은 감회 깊게 말했다. 작은 키에 체력도 딸렸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발이 닳도록 심부름하면서 배운 보람으로 그는 건축현장에 필요한 목공일을 숙달할 수 있었으며 기술일군들의 총애 속에서 그들의 재간을 배워낼 수 있었다.

1976년, 채규억은 훈춘시건축공사에서 종업원 모집을 하는 것을 보고 초빙에 응해나섰다. 로동현장에서 단련된 다부진 몸매와 토목기술에 막힘없는 그를 본 건축회사에서는 선뜻이 초빙했다. 눈썰미가 빠르고 부지런한 채규억은 인차 단위에서 중시하는 인물로 되여 반장, 기술원, 시공항목 관리원으로 승진했고 고층건물을 시공할 수 있는 ‘공정건설자격증’까지 따냈다.

개혁개방의 물결이 일자 채규억에게는 비전의 날개가 돋았다. 건축질을 보장할 수 있는 하청업체를 찾고 있던 건축회사들에서는 채규억에게 ‘독립’하여 창업할 것을 권장, 2003년 채규억은 정식으로 사직하고 창업했다.

“다리를 절단할 위기까지 겪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두뽐 넘게 생긴 나무뿌리 모양의  무릎의 깊은 허물을 가리키면서 채규억이 말했다. 최악의 환경에서 최고를 향해 달렸던 그의 피타는 결기가 보이는 대목이였다. 비록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룩거리지만 그는 더욱 이악스레 일했고 업계에서는 “채규억이 맡아한 공정은 실수가 없다.”는 정평까지 돌았다.

훈춘의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하나 둘 그의 손에서 일어섰고 그의 회사는 23층 이상 건축공사를 맡아할 수 있는 자격증까지 따게 되였다. 당시 훈춘에는 23층 건축건물을 세울 수 있는 회사가 2개밖에 없었다.

건축업계에서 분전하던 그는 퇴직년령을 맞아 건축업에서 서서히 손을 놓았다. 파란만장했던 인생길을 되돌아보면서 그는 물질적인 재부에 걸맞은 정신적인 재부를 창조하기 위한 일에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2010년, 채규억은 80여만원을 투입해 훈춘시진달래예술단을 세웠다. 악대, 가수, 무용 등 다양한 인재 38명을 구비한 종합예술단이 탄생했다.

채규억은 “공연 질만 높일 수 있다면 대가를 따지지 않고 후원한다.”는 당찬 약속을 실행, 주방과 화장실까지 구비한 200여평방메터 되는 활동실을 무상으로 내놓았고 복장과 악기도 무상으로 제공했다.

설립 10년간 부대, 양로원, 사회구역, 농촌마을을 상대로 1000여차 공연했고 이 예술단의 부채춤과 진달래무용은 수차 국가급 상을 수상했다.

훈춘 도심과 근 100킬로메터 떨어진 춘화진으로부터 시작해 삼가자 만족향 립신촌, 반석진 동흥촌, 마천자향 남산촌, 춘화진 하동촌, 방천 등 오지에까지 찾아가 공연을 했다.

2011년 이들은 춘화진에 주둔하고 있는 무장경찰부대, 변방파출소, 삼림무장경찰중대를 찾아 위문공연을 진행, 500여명이 운집해 관람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훈춘시관광국의 요청으로 방천국가급풍경구에서 로씨야 손님들을 위해 3일간 특별공연을 하기도 했고 훈춘시내에 특설된 ‘로씨야’거리에서 저녁 8시부터 한시간 동안 로씨야 관광객 유치를 위한 공연무대를 펼치기도 했다. 2012년에는 훈춘시진달래예술단 당지부를 정식으로 설립했고 2015년에는 ‘길림성급 문화하향 혜민공연단위’로 공식 지정되였다.

민족문화사업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채규억은 주당위 선전부와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으로부터 ‘문화달인’으로, 훈춘시정신문명건설위원회로부터 ‘훈춘을 빛낸 좋은 사람’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로령사업위원회로부터 ‘경로문명호 선진인물’로 표창받았다.

지난 8월, 채규억은 훈춘시당위 선전부로부터 ‘훈춘시 새시대 문명실천홍석류련맹’ 부비서장으로 임명되였다.

“제 나이가 인젠 70을 넘었는데 사실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에서 고무격려하고 또한 민족문화 사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책임을 맡게 되였습니다.”

진달래예술단 단장으로부터 훈춘시 민간문화예술 사업을 지도하고 총괄하는 중요한 자리에 오른 그의 어깨는 무겁다. 그는 당과 국가의 정책을 제때에 기층 민간문화예술단체에 전달하고 조선족민간예술로 하여금 형제민족민간문화 예술간의 비교와 대비 속에서 경쟁을 통해 승부하는 그런 국면을 형성하고 싶다고 했다.

“여러가지로 어렵고 부족한 면이 많지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따라준 예술단 성원들이 너무나 고맙고 항상 묵묵히 내조해준 안해가 고맙습니다.”

‘건축왕’으로부터 민간문화예술단체 수장으로 된 그의 꿈은 무엇일가?

“지금은 좀 이른 약속입니다만, 국제도시인 훈춘에서 살고 있는 것 만큼 국제대회를 한번 열고 싶습니다.”

채규억 단장이 조심스럽게 소망을 내비쳤다. 국내 조선족민간예술단체는 물론 로씨야의 문화예술단체도 초청해 축제의 장을 열고 싶다고 했다.

남은 여생을 조선족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작지만 강한 남자 채규억, 민족예술의 저력이 그의 작은 체구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

  허강일 기자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崔美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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