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꾜 7월 6일발 신화통신 기자 진택안 리광정] 일본 근현대사 학자이며 상해교통대학 부연구원인 이시다 다까유키가 신화사 기자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여러가지 원인으로 많은 일본 국민들은 아직 일본의 전쟁 책임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서 “오직 우리가 잘못을 직시하고 책임을 인정하며 재차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스스로 방지해야만 비로소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진정으로 피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시다는 “전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서만이 아니라 일본이 력사 고치기에 적극 나서는 움직임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침략군은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전면적인 중국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이시다는 “7월 7일은 중국인에게는 뼈아픈 날이지만 일본에서는 이 날자와 그 배후에 숨겨진 력사적 사건에 대한 관심이 적다. 일본인들은 오히려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탄이 투하된 8월 6일과 8월 9일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다.
이시다는 “일본의 학교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된 원자탄 폭발의 내용을 반복하여 가르치면서 이는 인류가 반복해서는 안될 비극과 고난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가 중요한 군사기지로서 일본의 병력과 무기 수송의 거점이였기 때문에 원자탄 폭격의 목표가 되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 사회에는 원자탄 투하 사건의 력사적 배경을 의도적으로 희석하거나 무시하는 사고방식이 존재하며 이러한 방식은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침략 행위가 엄중하게 무시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반면 원자탄 폭격은 일본의 ‘피해 경험’으로 부각됐다.”고 말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일본천황 히로히토는 라지오 방송을 통해 《종전 조서》를 발표하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사다는 ‘패전’을 ‘종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의 침략과 전쟁 책임에 대한 외곡과 모호화가 패전 당시부터 이미 시작되였음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이시다는 또한 일본 정부가 력사교과서 수정을 추진하는 데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로구교사변을 둘러싸고 일본의 중학교 력사교과서인 국사교과서(제7판)는 일본군이 북경 교외의 로구교 부근에서 야간 훈련중 정체불명의 총격을 받았으며 8일 새벽에 일본군이 국민혁명군 진지를 공격해 쌍방이 교전에 빠졌다고 씌여져있다.
이시다는 “소위 ‘중국측 도발이 먼저 있었다.’는 관점을 교재에 넣은 것은 일본의 침략을 변호하고 미화하기 위한 것인데 사실 ‘일본군이 왜 북경 교외에 주둔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일본군이 그곳에 나타난 것 자체가 도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시다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묻지 않고 침략행위에 대해 거의 침묵하는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많은 일본 국민들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과거의 침략전쟁을 대할 때 그들은 흔히 자신과 무관하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시다는 “이는 매우 소극적인 평화주의이다. 나는 이런 ‘평화주의’에 물음표를 붙이고 싶다.”면서 “‘이는 우리가 잘못을 범했고 끔찍한 일을 저질렀으니 이제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반성하는 평화주의가 아니라 ‘우리는 더 이상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고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회피적 평화주의이다.”고 지적했다.
이시다는 새롭게 쓰여진 력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중 일부는 이제 성인이 되였지만 그들은 전쟁의 력사 전모를 잘 모르며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이를 ‘아시아 해방’ 전쟁이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이는 바로 전쟁시기에 일본 군국주의가 선전한 론조라고 피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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