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서□ 려금산

2023-04-28 09:50:15

엄마는 리씨 가문의 5남매중 둘째딸로 태여났다.

남존녀비 관념이 심한 그 세월에 딸 넷에 아들 하나를 둔 가문에서 엄마는 셈에도 없었다. 언니는 시름시름 앓고 있는 장기환자였고 남동생은 가문의 왕이니 떠받들리기 마련이였으며 바로 아래 녀동생은 입에 기름칠만 하면서 내 몸이 다슬세라 아끼는 사치군이였고 막내 녀동생은 응석받이라 성격이 급하고 일손이 큰 엄마가 가정의 모든 일을 떠메고 나가는, 세대주 못지 않은 드센 농군이였다. 일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일이 보이지 않았지만 엄마의 손에서는 항상 일이 떨어질 틈이 없었다.

사내 같은 처녀였지만 결혼은 해야 했다. 부모가 맺어준 연분으로 결국 삼남 형제에서 둘째인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았다. 그렇게 가정생활이 시작되였다. 험난한 세월에 맨손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은 엄마를 더욱 힘들게 하였다. 게다가 아버지는 잘생기고 다부진 체격이였지만 보기보다 달리 성격이 태평이고 일손이 느리면서도 거친편이여서 성급한 엄마와는 전혀 장단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끝까지 가야 하는 세월에 엄마는 꾹 참고 묵묵히 가정살림만 착실하게 꾸려나갔다. 서로 구차한 사람끼리 인연을 맺었는지라 신세를 볼 곳도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기에 억세게 일만 했었다.

엄마는 19세에 첫아들을 보았다. 첫 아이의 탄생은 엄마의 최대 기쁨이였고 희망과 생명이였다. 아들도 무척 귀엽고 총명하였다. 하지만 언제 뽀뽀 한번 해주고 살가운 사랑을 줄 틈이 없었다. 낮이면 애를 업고 나가 밭머리에 눕혀놓고 정신없이 농사일만 했고 밤이면 집안일과 바느질을 하느라 애는 혼자 뒹굴다 잠들기 일쑤였다. 잠든 애의 볼에 입맞추는 엄마는 그렇게 매일매일 밤잠을 설치면서 나날을 보냈다. 집집마다 자식을 많이 보는 세월이라 엄마는 19세에 시작한 산고를 42세에야 끝냈는데 도합 9명의 자식을 보았다. 맏이부터 아홉째까지 하나씩 이름을 부르자 해도 헷갈리고 한참이나 걸리겠는데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모든 것을 돌보자니 얼마나 힘들었을가.

엉덩이를 땅에 붙일 틈도 손발이 마를 틈도 없이 보냈지만 애가 앓으면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가보고 애석하게도 세 아이를 잃고 아들 네명과 딸 둘을 겨우 살려냈다. 엄마는 잃은 자식들이 아까워서 눈시울을 적시며 똑똑하고 총명한 것이 먼저 갔다고 비통해하셨고 고운 옷을 보나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늘 돌아앉아 저고리소매로 눈굽을 찍었다. 막내인 나는 엄마가 흐느끼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그때는 생각 없이 멍하니 바라만 보았지만 엄마가 되면서 비로소 그때 엄마의 그 가슴 아픈 고통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태여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갖고 태여나는데 살려내지 못하고 보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랴!

물려받은 재산이라군 전혀 없이 빈손으로 살림을 일떠세우면서 애를 여섯이나 키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엄마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떻게 해서라도 애들의 성장을 위해 세끼는 떨구지 않았다. 밤이면 식구들은 네모퉁이는 봉당인 구들에 가시가 몸을 쑥쑥 찌르는 수수깡깔개 하나를 펴고 누워 하늘이 쳐다보이는 누더기이불 한채에 빙 둘러 발만 넣고 웃몸은 낮에 입던 겉옷을 덮고 밤을 지새웠다. 잠자리에 들 때에는 모두들 얌전히 눕지만 잠이 들기 시작하면 이불은 힘센 누군가의 몸에 덮여있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아들 넷은 키가 구척이고 어깨가 쩍 벌어진 대장부로 자랐고 딸 둘도 키가 작지만 물 찬 제비 같은 몸매로 성장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저 아줌마가 아들은 진짜 사내답게, 딸은 녀자답게 두었다고 부러워했다.

역경 속에서도 엄마는 자식들에 대한 원대한 바람과 신념이 선명했으며 교양면에서 주장이 따로 있었다. 엄마는 여섯 자식에 대하여 첫번째는 정직한 사람으로, 두번째는 먹물이 든 사람으로 키우려고 큰아들부터 시작하여 엄하게 요구했다. 엄마는 자신이 못한 공부를 자식들에게 기대하면서 공부에 대한 자식들의 요구라면 끼니를 포기하고 밤을 지새우면서 손수 해주셨고 때로는 체면을 버리고 온 마을을 돌면서 빌려서라도 꼭 해결해주었다.

엄마는 항상 자기가 무능하고 무식해서 미안하다면서 자식들을 꾸지람 한번도 하지 않았다. 궁량이 깊고 솜씨가 좋으신 엄마는 자식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하기 위해 개와 돼지를 많이 키웠다. 손에 쥔 것이 없으니 가축을 사도 작고 여윈 것을 싸게 사서는 집식구 키우듯이 생생한 풀도 뜯어먹이고 먹이를 끓여먹이면서 살뜰하게 키웠다. 엄마는 속이 답답할 때면 늘 돼지우리 바자를 잡고 서서 꿀꿀이와 대화라도 하는 듯 넉두리를 하면서 모든 고생을 잊는 듯싶었다.

모진 고생으로 엄마는 세월따라 수척해졌고 년로해졌지만 자식들은 잘도 커갔고 엄마의 바람 대로 바르게 성장했다. 남보다 못 입히고 못 먹여 키웠지만 모두 공부를 잘하고 착하여 부모들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다른 집들에서는 애더러 자꾸 공부하라는 싸움인데 우리 집에서는 공부하지 말라는 싸움이였다. 자식들의 나이 차이가 두세살이다 보니 집에는 대학생, 고중생, 초중생, 소학생 각 학업단계의 학생들이 다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돈소리 끊어질 때가 없었다.

“엄마 학비?”

“아버지 책값?”

“내 책가방이 구멍났어.”

“형님이 신던 검정고무신이 인젠 너무 작아.”…

그럴 때마다 셈이 든 자식은 차마 돈 달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고 마음이 어진 놈은 아예 무단결석하기도 했다. 엄마의 방법은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돈을 빌려서라도 애들을 학교에 가게 하는 것이였다. 그러고 나서 애들을 학교에 보낸 후면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시장에 내다 팔아 모아서는 빚을 제때에 갚았다. 교통이 불편한 세월에 엄마는 메고 이고 들면서 수레에 싣는 것보다 더 많이 들고 다니셨다.

한번은 연길에 와서 장을 보고 늦은 오후에 커다란 김치독을 사서 이고 30여리 길을 걸어서 떠났다. 초겨울인데도 바지가 없어 홑치마를 입고 사나운 서북풍을 맞받아 집으로 향했는데 절반쯤 걸으니 눈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길표시로 리용되던 7자 모양을 한 늙은 느릅나무만 찾으면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사방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가릴 수 없었다. 걷고 걸어도 온 벌판에 혼자 뿐이였던 엄마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귀인이 있었는지 등잔불빛이 새여나오는 오막살이집이 나타나서 길을 물었더니 집주인이 큰길까지 데려다주면서 방향을 가리켜준 덕분에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보배처럼 이고 온 김치독을 내려놓은 엄마의 몸은 물자루가 되였지만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고 누우셨다. 조용히 누운 엄마의 얼굴은 래일 아침 애들이 학비를 받아쥐고 좋아서 퐁퐁 뛰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감으로 물젖어있었다.

손에 쥔 물건도 누가 물으면 내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정직했던 엄마는 항상 애들을 옳바른 길로 이끌었다. 넷째오빠와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 일이다. 어느 한번 엄마는 키워서 팔려고 누렁이 한마리를 사왔다. 무척 령리하고 약삭발랐던 그 개를 넷째오빠는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개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꼬리처럼 졸졸 따라다녔는데 오빠의 훈련을 받아 사람처럼 말을 알아듣고 행동하였다. 개와 오래동안 정이 깊게 든 오빠는 엄마가 개를 팔가봐 걱정되여 엄마에게 절대 팔지 말라고 여러 번 청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엄마는 넷째오빠가 학교로 간 뒤 조양천 장마당에 가서 개를 팔았다. 하학 후 오빠는 개가 없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저녁밥도 안먹고 울며불며 돈을 되돌려주고 개를 찾아달라고 애걸하였다. 오빠의 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엄마는 정말 미안하다며 오빠를 차분하게 달랬다. 오빠는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밤은 조용히 지났다. 이튿날, 예전 같으면 이른아침부터 개와 마당에서 뛰놀면서 북적거렸을 오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책가방만 덜렁 메고 학교로 향했다. 나도 말없이 오빠의 뒤를 얼른 따랐다. 오빠는 앞에서 걷다가도 내가 걱정되여 힐끔힐끔 뒤를 살폈다.

그날 저녁 내가 하학하여 집마당에 들어서니 팔려갔던 개가 집문을 반쯤 열어놓고 마루를 베개처럼 하고 맥없이 누워 자고 있는 것이였다. 너무 좋아 달려가 개를 안고 보니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있었고 발은 터져 피가 질벅했으며 온몸이 가시천지였다. 개는 인차 잠을 깨고 꼬리를 저으며 나를 핥기 시작했다. 홀쭉해진 배를 본 나는 먹일 것이 없어서 물 한바가지를 퍼주었더니 정신없이 들이키는 것이였다. 조금 뒤 축 처져 집으로 돌아오던 오빠가 개를 보자마자 책가방을 내던지고 개와 춤판을 벌렸다. 엄마의 속내를 빤히 알고 있는 오빠는 개를 산 사람이 우리 집도 모르고 개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니 절대 돌려주지 말라고 엄마와 두 손을 싹싹 비며 애걸복걸하였다. 엄마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돈을 받았는데 립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렴!”하고 한마디만 하셨다. 엄마는 오빠의 애원하에 개를 이틀간 잘 먹이고 오빠와 기껏 놀게 한 뒤 개를 산 사람을 찾아나섰다. 개를 사간 사람은 너무도 감사하다며 엄마한테 2원을 더 주었다.

엄마의 이런 바른 처사는 자식들에 대한 글자 없는 좋은 교재로 되였다. 이런 교양하에 우리 여섯 자식들은 바르게 성장했다. 큰오빠는 연변대학 제1기 졸업생으로 심양고중에서 교원사업을, 둘째 오빠는 대련철도학원을 졸업하고 장춘렬차공장에서 사업했고 셋째 오빠는 연변고중을 다니다가 농사일에 종사했다. 특수한 시대에 대학시헙을 보지 못했던 언니는 조양천고중을 졸업하고 모 중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했고 역시 대학시험을 보지 못했던 넷째오빠는 조양천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했다. 막내인 나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원사업을 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 여섯 자식을 이만큼 키워낸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일생동안 자식만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한평생을 사신 엄마! 엄마는 평생을 자식과 가족만을 위해 사셨다.

얼마나 위대한 엄마인가? 얼마나 당당한 엄마인가? 나는 이런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커왔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녀성으로. 허나 나의 가슴 속에는 너무나 큰 돌덩이가 박혀있다. 내가 고중을 다닐 때의 일이다. 그땐 우리 집에 공부하는 학생이 나 하나 뿐이였지만 생활은 그냥 피지 못했다. 고생이 장고생이라고 엄마는 자식들이 나이드니 시집장가를 보내고 집살림을 꾸려주느라 숨 쉴 틈이 없었다. 늦가을의 어느 날, 학교에서 점심밥을 먹고 친구들같이 조양천시장 길을 따라 산책을 하였다. 시장골목 량켠에 장사군들이 줄느런히 앉아있었는데 앞에서 흥얼거리며 걸어가던 나는 그만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말았다. 검은색 홑치마를 입고 장보러 오신 엄마가 채소더미 옆에 맥없이 누워계셨던 것이다. 나는 코등이 찡해났다. 나는 다가가다가 문뜩 멈추었다. 뒤에 친구들이 대부대처럼 따라오는데 엄마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가? 나는 머리를 푹 숙이고 느릿느릿 걸었다. 부모를 몰라라 하는 게 더 큰 창피고 수치이며 세상에서 제일 바보 짓인 것도 모르고 친구들 뒤에서 돌아서서 엄마를 멀리 바라보며 가재걸음을 했다.

오후 공부는 무슨 정신에 했는지 모르고 집에 달려갔다. 엄마도 돌아와 저녁밥을 하고 계셨다. 나는 엄마를 마주할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모순에 빠진 나는 죄책감으로 입을 열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그날밤을 묵묵히 지냈다. 아침이 되였지만 그냥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 한주일, 한달, 1년이 지났다. 아니 몇년, 몇십년이 지났다. 나는 끝내 엄마 생전에 진심으로 죄를 빌지 못했다. 엄마 내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한바탕 죽게 욕해달라고 이 딸을 절대 용서해주지 말라고 무릎 꿇고 벌을 받게 해달라고… 엄마의 자식으로 태여난 것을 자랑으로 못 여길망정, 엄마를 소리높이 자랑하지 못할망정, 위대한 엄마를 두어서 행복하단 말을 못할망정 어쩌면 이렇게 벙어리처럼 멀쩡하게 살아왔단 말인가? 세상물정을 모를 나이도 아니였는데 정말 리해할 수 없는 멍청이였다.

‘엄마 아셨어요? 딸이 이 정도였단 것을… 믿어지지 않지요? 아니 믿을 수가 없지요.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요.’

엄마 생전에 거의 10년 되게 죄를 숨기고 있다가 세상 뜨신 후에야 청명, 추석이면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 흙무덤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날이때까지 죄를 빌었다.

나는 해마다 산소에 갈 때면 잊지 않고 귤을 꼭 갖고 간다. 언젠가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아이의 탁아소 간식으로 산 귤 3개를 엄마에게 대접시키지 못한 일이 맘에 걸려서이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해 여름방학, 나는 연길시로 전근하겠느라 애를 업고 이리저리 뛰면서 엄마 보러 별반 가지도 않았으니 방학동안 내내 앞이 흐리게 연길쪽만 바라보았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쓰려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시간이 흐를수록 더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엄마 생신이나 기일이 돌아오면 행여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을가 기대해도 감감무소식이다. 지은 죄는 가슴 속에 박힌 큰 돌덩이가 되였다. 꿈속에서라도 엄마를 만나면 무릎 꿇고 죄를 빌려고 기도했지만 때는 너무너무 늦었고 기약도 없이 누가 부르는 듯이 급하게 훌쩍 떠나가신 엄마는 내 눈앞에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한평생 자식만을 위해 살과 뼈를 깎아오신 엄마는 단 하루도 근심걱정 없이 다리펴고 허리 펴보신 적이 없었으니 가시는 길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쉬우며 억울하고 원통하셨을가? 평생 입을 고생, 먹을 고생, 돈고생… 고생만으로 사신 엄마는 69세란 짧은 인생을 보내셨다. 기구하고 험난한 인생, 하루밤의 꿈자리와도 같은 인생을 지내신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근심걱정 없이 보낼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다시 두 손 모아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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