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기분이 좋아 마음이 후련하고 만족도가 높은 생활을 누릴 때 느낄 수 있다. 내 나이 예순넷, 안해로, 엄마로 살아온 지도 30여년이 되는데 요즘따라 나는 자신이 행복한 안해이고 행복한 엄마라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남편은 나를 사경에서 구원해준 은인이고 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달갑게 할 수 있는 보호신이다. 나는 30대 중반에 크게 앓아 가족들을 걱정시킨 적이 있다. 그때 아들은 겨우 5살이고 남편은 37살이였다. 위병이 심각하다는 진단을 받자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화룡시병원에서 보름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나는 불과 며칠 사이 온몸의 기운이 싹 빠지고 몸이 가을의 나무잎처럼 말랐고 눈까풀이 천근무게로 내려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를 위해서 로심초사하던 남편은 연변병원에 위병치료에 용한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나를 연변병원으로 옮겨주었다. 용하다는 의사선생님은 먼저 위약 일곱첩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그 약을 다 먹어도 차도가 나지 않았다. 나는 절망에 빠지였다. 남편은 가느다란 희망도 놓치지 말자며 내 손을 꼭 잡고 연길에서 용하다는 의사들을 더 찾아다니며 발품을 들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나는 드디여 저승사자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툭툭 털고 일어나 출근을 하게 되였다. 춥고 긴 겨울을 이겨내고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듯 내 생명에도 다시 봄이 찾아온 것이다. 남편은 나에게 두번째 생명을 준 은인이였다.
다시 출근을 하는 나는 이 세상의 행복을 통채로 받아안은 기분이였다. 교원사업을 무한히 사랑하는 나는 교단에만 서면 힘이 용솟음쳤다. 그러나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녹작지근하였다. 남편은 내가 조금만 밥맛을 잃어도 어디 아픈 건 아닌지 하고 걱정을 했고 내가 무엇을 먹고 싶다 하면 한밤중에라도 인차 사다주군 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나는 많이 먹지 못하였다. 남편은 안해가 맛나게 많이 먹어주기를 갈망했지만 그 소박한 소망마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많이 서운해하였다.
정년퇴직을 하자 남편은 내가 걱정되여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도 하고 맛집에 다니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자가용의 뒤자리에 앉은 내가 소르르 잠이 들군 했는데 그때면 남편은 길옆에 차를 세우고 나를 편히 자게 하였다.
몸은 허약하지만 늘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남편이 곁에 있어 행복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세상에 태여났고 남편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여난 것 같았다. 나에게 남편은 남편일 뿐만 아니라 간병인이고 오빠 같은 고마운 존재였다.
웃물이 맑으면 아래물이 맑다고 나의 아들 또한 효자이다. 한유는 일찍 이런 명언을 남기였다.
“친근하게 지내면서 존경하고 생전에 잘 모시고 세상 뜨면 정히 묻으라.”
우리 아들은 이 명언을 명기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 같았다.
아들은 대학에 다닐 때부터 엄마를 챙겨주었다. 겨울방학의 어느 날 동창모임이 있었는데 입고 갈 옷도 들고 갈 가방도 변변한 것이 없었다. 어느새 눈치를 챈 아들은 이제 자기가 돈을 많이 벌어 엄마를 멋쟁이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학생인 아들이 무슨 재간으로 돈을 버는가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대학 2학년 겨울방학에 집에 돌아온 아들이 뭉치돈을 내놓으며 백화에 가자고 하는 것이였다. 내가 어안이 벙벙해하자 아들은 그동안 가이드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고 했다. 장부일언이 중천금이라고 아들은 엄마와의 약속을 굳게 지키였다.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엄마에게 예쁜 옷과 핸드백을 사드리려 했다. 나는 일찍 철이 든 아들에게 감동되여 마음이 울컥했다. 아들과 함께 백화에 가서 이옷저옷 입어보고 이 가방 저 가방 들어보며 행복에 푹 젖었다. 거금을 들여 맘에 드는 옷과 가방을 산 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서 최고로 느껴졌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3년 뒤에 결혼을 하였고 결혼한 이듬해에 귀동자를 낳았다. 출근하면서 위챗장사까지 하는 아들은 수입은 쏠쏠했지만 하루하루를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보냈다.
내가 손자를 봐주겠다고 했지만 아들은 몸이 허약한 엄마가 손자를 봐주기 어렵다며 나의 손을 바라지 않았다. 매일 영상통화로 건강하게 자라는 손자를 보며 나는 힐링되였다.
아들은 크고 작은 명절을 빼놓지 않고 선물을 보내오고 명절이 아닌 평일에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택배로 보내오군 했다. 한번은 광고를 보고 유자가 맛있어보여 사서 보내왔는데 자기네 집에 먼저 도착한 유자가 맛이 별로이니 부모님들도 맛이 없어 할가 봐 걱정하면서 전화가 왔다. 내가 유자가 달콤새콤해서 너무 맛있더라고 했더니 그제야 시름을 놓는 것이였다.
재작년 음력설에 나는 아들집으로 설 쇠러 갔다. 그렇게 보고 싶던 손자를 품에 안으니 그 기쁨은 한량 없었다. 그날 저녁 아들집에서 그동안의 회포를 나누고 이튿날 우리 부부가 살게 될 새집으로 갔는데 그동안 아들이 이미 장식도 잘 해놓았고 가전제품도 구전하게 갖추어놓았다. 며느리가 이부자리도 예쁘게 마련해놓고 주방도구도 가장 예쁜 것으로 갖추어놓았으며 커다란 전기랭장고 안에는 해산물과 고기, 음료, 과일을 빈틈없이 꽉 채웠다.
아들은 우리가 청도에 머무는 20일 동안 우리를 호강시키느라고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청도의 맛나는 음식을 먹고 청도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아들이 출근하면 며느리가 우리를 모시고 다니며 구경시키고 저녁에 아들이 또 가까운 데를 데리고 다니며 효도했다.
재작년 9월에 나는 손자를 안아보고 싶었지만 코로나가 두려워 보러는 가지 못하고 그저 집에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녁에 아들이 고향으로 오는 비행기표를 뗐다며 래일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온몸에 기운이 솟는 듯했다.
고향에 돌아온 아들은 내가 때시걱을 갖추며 힘들어할가 봐 연길의 맛집들을 검색하여 가족외식을 자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내의 경치 좋은 곳을 검색하여 알아보고 우리를 모시고 다니며 기쁨과 즐거움을 듬뿍 안겨주었다.
회사에 해야 할 일이 많고 많지만 낮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고 저녁에야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마주앉아 일을 했다. 그러는 아들이 안스러워 이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걱정 말라며 일은 매일 저녁 잘하고 있다고 했다. 아들은 국경절까지 한달동안 엄마의 곁에서 엄마를 기쁘게 하였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날 아들은 백화에 가서 아버지와 엄마에게 브랜드옷을 한견지씩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들네가 떠나간 후 서랍을 열어보니 두터운 빨간봉투가 눈에 띄였다. 열어보니 안에 사랑이 담긴 따뜻한 메모와 함께 빨각빨각하는 100원짜리 지페 100장이 차곡차곡 들어있었다. 눈굽이 젖어들었다.
“이번에 와서 돈을 퍼그나 썼는데 또 이렇게…”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적지만 이 돈으로 건강을 잘 챙기라고 했다.
지난해 12월에 손녀가 태여나게 되면서 아들 곁에 가서 두달 반 머물렀는데 집으로 돌아올 림박에 아들은 우리를 모시고 남방의 도시들을 유람시켜주었다.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 미안해하면 돈은 벌 줄도 알고 쓸 줄도 알아야 한다며 자기를 믿어라고 했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돈이 넉넉하니 마음껏 향수하라고 했다. 이젠 두 아이의 아버지인데 돈을 아껴쓰라고 했더니 아껴 쓰느라 애쓰지 말고 돈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벌수 있는가를 더 많이 생각해야 부자가 된다고 했다.
이제 겨우 서른네살의 내 아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의젓하고 따뜻하고 매력이 넘친다. 자식 자랑하면 바보라고 하지만 난 자제 못하고 입만 뻥긋하면 아들자랑이다. 저도 몰래 내 아들을 키우던 과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와 남편은 종래로 아들을 공부하라고 닥달하지 않았다. 그저 책을 많이 사주고 책을 열심히 읽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난하게 살아가면서도 명절이나 주말이면 량손 가득 맛나는 것을 사들고 량가 부모님 뵈러 갔고 부모님들과 다정하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나누군 했다. 때론 어린 아들이 할머니네는 우리보다 더 잘 사는데 왜 이렇게 많이 사가는가고 물으면 이건 자식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며 너도 어른이 되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알아듣기 쉽게 말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이 세배돈으로 부모에게 생일선물을 사주면 크게 고마워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가정교육들이 모여 효성스러운 우리 아들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칼위터는 일찍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지 타고난 자질이 아니다.”고 말했으며 크롭스까야는 “부모는 천연적인 교원으로서 아동, 특히는 유아에 대한 그들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공감되는 소중한 명언이다. 우리 부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곁에서 보며 자란 아들이기에 이렇게 따뜻한 아들로 성장한 것이다.
몸이 많이 허약하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30여년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은 나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결혼 35돐이 되던 날 남편에게 술을 부으며 진지하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당신이 내 남편이여서 나는 정말 행복한 안해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현처가 되여 당신을 잘 챙길 겁니다.”
“당신의 건강이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오. 더 잘하려다 아프면 안되오. 그리고 교육할 줄 하는 엄마가 곁에 있었기에 우리 아들이 훌륭히 컸소.”
남편의 온기 넘치는 말은 나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늘도 나에 대한 남편의 사랑과 나에 대한 아들의 효도는 진행형이다. 그래서 나는 너무 행복한 안해이고 행복한 엄마이다. 파랑스는 일찍 이런 말을 하였다. “진정한 행복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동안 받은 사랑을 남편과 아들에게 배로 돌려주며 베품이 주는 색다른 행복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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