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촌 □ 허문룡

2023-09-15 08:40:23

외할머니네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을 두었다.

외할머니댁의 같은 동네 이웃에는 외할머니의 친오빠네가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우리 말로 외할머니의 오빠를 뭐라고 호칭해야 할지 몰라 그저 중국말 그대로 ‘쮸로예(舅姥爷)’라고 불러왔다. 쮸로예한테는 녀동생이라고는 외할머니 하나 뿐이여서 두 집 식구는 가깝게 지내왔다.

외할아버지 슬하에 아들이 없었고 또 두 집 사이 관계가 좋다 보니 어릴 때부터 우리는 쮸로예의 아들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사실 촌수를 따지면 나하고는 5촌이고 엄마의 외4촌 동생에 불과하다.

어릴적 기억이 있을 때부터 삼촌은 온집안의 상층 인물이였다. 외증조할머니가 나한테는 먼 존재이지만 삼촌의 친할머니이다. 외증조할머니는 생전이실 때 삼촌에게 유난히 정을 주셨다. 외증조할아버지가 혁명렬사인데다 아들이 쮸로예 하나 뿐이고 또 그 피줄인 삼촌도 독자이니 당연히 가족의 ‘황태자’로 될만 했다.

삼촌도 바르게 잘 자랐다. ‘천군만마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년대’에 삼촌은 끈질긴 노력으로 대학에 붙었고 졸업한 후 대도시에 분배를 받았으며 호구도 옮겨갔다. 80년대말로 놓고 말하면 동네를 들썩이는 경사로 될만한 일이였다.

90년대 중반부터 동북에 있는 국영기업이 나라의 정책에 따라 우선 먼저 개혁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그후 많은 국영기업의 ‘철밥통’들이 잘리게 되였다. 그러나 삼촌은 대다수 사람들처럼 그저 잘리울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사직서를 내고 북경에 진출하였다. 그후부터 매년 설에만 한번씩 만날 수밖에 없었다.

삼촌은 그럭저럭 북경에서 잘 나간 것 같았다. 인상이 제일 깊은 것은 소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삼촌이 설 쇠러 고향에 내려왔던 때이다. 나는 삼촌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친구들한테 자랑을 하였다.

“야! 다 봤지? 검은색 가죽 잠빠 입은 사람이 우리 삼촌이다! 앞으로 다들 까불대지 말라!”

그 기세가 호랑이를 업은 여우보다 더했다.

고중 3학년 시절이였던 걸로 기억된다. 그해 삼촌이 고향에 내려와 일을 보고 북경 돌아가기 전에 우리 외할머니한테 인사 올리러 왔었다. 어른들의 대화에서 나는 삼촌이 한국에 간다고 피뜩 들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저분은 참 대단하구나! 북경도 부족해서 인젠 외국에까지 진출하는구나…’하고 생각하고 꼭 대학에 붙어서 삼촌처럼 인생을 멋있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후 몇해 동안 련락이 없었다가 다시 만났을 때는 내가 한국에 석사연구생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였다. 나는 하마트면 삼촌을 못 알아볼 번하였다. 예전에 의기양양하던 모습은 어디갔는지 사라졌고 밭고랑처럼 짙은 주름살로 가득찬 얼굴에는 세월에 지친 피로만 보였다. 그래도 이국타향에서 조카를 만나 반가웠는지 그날 우리는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한국에서 연구생공부를 하려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에 보태야 했다. 그렇지 않고 중국에서 보낸 돈으로 살자면 모자랐다. 그래서 삼촌보고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했더니 자기네 식당에 오라고 흔쾌히 대답을 하였다.

그 식당은 단체손님을 받는 가게였다. 바쁠 때는 정신없어도 한가할 때는 지겨울 정도로 무료했다. 삼촌도 나도 성질이 급하다 보니 바쁠 때에는 서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한가할 때는 또다시 삼촌이요 조카요 하면서 수다를 떨기도 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부터 삼촌의 집안 ‘황태자’의 이미지는 언녕 없어졌다.

삶에 시달려서 그런지 퇴근 후 삼촌은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참 안스러웠다.

후에 알고 보니 내가 대학에 다니는 동안 삼촌은 결혼을 하였고 딸도 생겼다. 그러다 얼마 되지 않아 리혼하였고 또다시 홀몸으로 되였다.

참 부족한 조카였다. 삼촌이 언제 결혼한 것도 모르고 언제 딸이 생긴 것도 모르며 리혼한 것은 더더욱 몰랐다.

졸업을 하게 되자 나는 귀국했다. 국내의 발전은 너무 빨랐다. 사실 그분처럼 80년대 대학생들은 나처럼 확충모집한 후의 대학생보다 훨씬 ‘질’이 좋았다. 하지만 국내와 너무 오래동안 리탈해있다 보니 설령 귀국한다해도 립지가 마땅치 않아서 힘들게 한국에서 체력로동으로 돈을 벌 수밖에 없는 듯했다.

귀국하기 전날 나와 삼촌은 통쾌하게 술을 마셨다.

“중국에 들어가면 나처럼 살지 말라… 나는 이젠 50이 넘었으니까 이대로 살면 되고 너는 아직 젊었으니까 기회를 아껴라! 앞으로 잘되면 내 딸만 좀 챙겨다오…”

무엇 때문에 의기양양했던 삼촌이 이렇게 작아졌는지…

사회적 변혁이 너무 빠른 시대를 살아온 삼촌은 두 세대 사람에 걸쳐서 겪어야 했던 변화를 홀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시간도 너무 짧아서 준비도 채 되기 전에 다른 채널로 옮겨야 하였다. 삼촌으로 놓고 말하면 모든 인생 장면의 교체가 너무 빨랐던 것이다.

이제야 깨닫게 되였다. 마지막 그날 술마시다가 삼촌이 왜 나를 빤히 보면서 웃기만 했는지…

  어쩌면 돌아가신 쮸로예와 외할아버지 생각이 났을 것이다. 아마도 그 순간만은, 9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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