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밤 사이에 아들로부터 ‘오빠’로 부상한 나. 엄마는 날 ‘오빠’라 부른다.
엄마에게는 오빠 한분, 남동생 한분이 있었는데 오빠는 몇십년 전에 해외로 나가 세상을 뜬 지 오라고 남동생도 몇년 전에 사망하였다. 해외로 나간 오빠가 그리워서 날 ‘오빠’라 부른 것일가?
엄마에게는 새로운 모습이 많이 생겼다. 한족말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손자가 한족학교를 다녀서인지 평소에 한어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나와도 한어로 대화할 때가 많다.
지난해 8월 1일로 기억된다. 세 고모의 가족들이 엄마를 보러 왔는데 너무 격동되였던지 엄마는 이튿날 그만 치매가 왔던 것이다.
나와 작은 손자는 알아보나 한국 간 며느리와 큰손자는 알아보지 못했다. 무슨 사람들이 우리 집에 뛰여들어 마음 대로 휘젖고 다니냐면서 노발대발했다.
하루밤 사이에 치매가 온 로친, 알고 보면 엄마는 지난 세기 70년대와 80년대초에 연변일보 통신원으로 활약한 분이다. 엄마가 쓴 기사는 자주 연변일보에 실렸는데 원고료 대신 《삼국연의》, 《수호전》, 《홍루몽》 등 고전명작들이 집에 우편으로 도착하였다. 그때는 조선어로 된 책들이 적었고 신화서점에 가도 보고 싶은 책들을 사볼 수 없는 시대였다. 돌이켜보면 이 책들은 나중에 내가 문학의 길을 걷는 데 큰 도움이 되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어려서 엄마가 연변일보 통신원이라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엄마는 언젠가 나에게 연변일보 통신원으로 된 사연을 들려준 적이 있다. 어느 해 3.8절에 도문고무공장 4차간에서 로동자로 있었던 엄마는 흑판보에 3.8절에 관한 ‘시’를 썼다고 한다. 선전과 윤과장이 그 ‘시’를 보더니 누가 썼는가 물었다. 동료들이 강현옥이 썼다고 하자 윤과장은 엄마에게 연변일보에 기사를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그래서 몇편의 통신을 투고한 것이 번마다 신문에 실리게 되면서 연변일보 통신원으로 되였고 원고료 대신 중국고전명작들을 받게 되였던 것이다.
엄마는 처음부터 연변일보 애독자였다. 내가 어렸을 때 도문백화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새 집을 분배받게 되였다. 그런데 그 새 집에 천정이 없었단다. 내가 “이게 무슨 집인가”며 들어가려 하지 않자 엄마와 아버지는 어디서 신문을 얻어다가 천정을 도배하였다고 한다. 그제야 나는 내켜서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엄마는 공장에서 연변일보를 주문해 보았고 날자가 지난 신문을 집에 가져다 읽다 보니 집에 신문이 많았던 것이다. 엄마는 한어로 된 연변일보까지 가져다 읽었다고 한다.
연길 시교인 와룡동에서 겨우 소학교를 졸업한 엄마는 중학교로 갈 나이가 되였지만 당시 뿌리 깊었던 부모의 남존녀비사상으로 인해 남동생은 조양천중학교에 보냈으나 엄마는 덜렁 학업을 중도이페하고 말았다.
후에 아버지와 결혼하여 나를 낳았는데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자 시내의 신화서점을 찾아가 《신화자전》을 샀다고 한다. 엄마도 읽고 나도 읽었다. 엄마와 아버지가 나에게 사준 《신화자전》은 무려 다섯책이나 되였다. 나는 학교로 갈 때마다 보풀이 일도록 자전을 읽고 읽었다. 나중에는 몇페지에 무슨 한자가 있는지 알 정도까지 되였다. 소학교 5학년에 이르러서는 파금의 소설 《집》을 사전을 찾으며 다 읽었다. 그것도 번체자로 된 소설을 말이다.
우스운 일은 그때 집에 텔레비는 커녕 반도체라지오도 없어 날이 어두워지면 천정만 바라보다가 잠이 들군 하였다. 그런데 천정이 몽땅 신문으로 도배되다 보니 나는 할 일이 생겼다. 제목을 거꾸로 읽는 습관이 생겼다. 례하면 “연변일보” 하면 거꾸로 “보일변연” 이렇게 거꾸로 읽었다. 그런데 좀 긴 제목은 쉽지 않았다. “목단강반에 풍년이 들었다”를 거꾸로 읽으려면 열몇번 읽어야 입에 올랐다. 그다음 거꾸로 기억한 제목은 너무 길어 거의 열흘 동안 거꾸로 읽는 연습을 하였다. “자산계급법적관념을 타파하고 공산주의 새 기풍을 수립하자”라는 제목을 거꾸로 읽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어릴 때 거꾸로 기억한 것이 지금 60이 다되도록 거꾸로 술술 읽으면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찬다.
“자하립수 을풍기 새 의주산공 고하파타 을념관적법급계산자”.
내가 이렇게 거꾸로 읽으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대단하다고 한다. 기실 새로 접촉한 문장 제목을 거꾸로 읽자면 쉽지 않다. 이는 어릴 적에 련습해두었던 밑천일 뿐이다…
소학교 때부터 나는 다른 애들처럼 상점에 들리지 않고 먼저 서점에 가서 책을 사보았다. 엄마가 타온 책 외에 나는 《로빈손 크루소》, 《집 없는 소년》, 《림해설원》, 《레미제라블》 등 국내외의 명작들을 많이 읽었다.
지금은 엄마의 ‘오빠’가 된 나,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마냥 내 눈앞에 삼삼히 돌아간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기자로 된 것도, 연변작가협회에 입회하여 작가라고 문학작품을 얼마간 쓰게 된 것도 기실 엄마의 ‘공로’가 아닐가. 내가 어렸을 때의 엄마의 일거일동이 나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자 나는 매달 계획, 목표를 세우고 달마다 책 한권씩 샀다. 대학을 졸업하니 많은 책들을 소장하게 되였다. 지금 집에는 칸칸마다 책들이 차넘친다.
날 ‘오빠’라고 부르는 엄마, 한족말이 일상용어로 된 엄마, 이제는 치매가 와서 사유가 범벅이 된 엄마, 그래도 난 엄마를 사랑한다. 85세 고령이지만 엄마, 오래 오래 살아요. 백살까지 모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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