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가족이니까…” □ 운 영

2023-10-27 08:16:21

지난 7월초, 오전시간이 막가고 있는 시점에 대학원에서 연구생 공부를 하고 있는 딸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고 보니 딸애의 목소리가 아닌 모를 녀자애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연이 아빠세요? 연이가 이른아침에 친구들과 함께 등산하다가 부주의로 넘어진 것이 걸을 수 없다고 해서 그대로 병원까지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발목이 골절 되였다네요.”

정작 딸애는 겁도 나고 아프기도 해서 감히 아빠한테 전화를 걸 수 없어 이렇게 대신 걸게 되였다면서 어떻게 하면 좋을가고 나에게 물어왔다.

갑자기 딸애의 골절소식을 들은 나는 정신이 아찔해났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전화를 바꾸라하고 딸애한테 구체적인 것을 물었다. 딸애는 떨리는 목소리를 눅잦히며 지금은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마쳤는데 다리에 석고를 대서 고정시키고 진통제주사를 맞아서 아픔은 멈춘 것 같다고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화장실 문제라고 했다. 의사선생님이 말하기를 병원에 입원할 필요는 없이 바로 퇴원이 가능한데 학교 기숙사의 화장실은 수세식 변기여서 석고를 댄 다리를 구부릴 수 없어 곤난하단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데려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곳으로 직행하는 고속렬차도 없고 당장 기차표 예매도 문제였다. 그래서 그쪽에서도 이쪽으로 오는 기차표를 알아보고 될 수 있으면 오늘 집으로 오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마음은 한시가 급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한스러웠다.

오후쯤 되여 딸애로부터 훈춘-가목사행 직행렬차 표를 끊어서 저녁 10시 반쯤 고향의 고속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련락이 왔다. 7월초부터 고속렬차가 개통된 것이 천만다행이였다. 쌍지팽이에 의지해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형편에서 딸애의 친구들한테 기차역까지 휠체어를 사용하고 렬차장을 찾아 최대한의 편리를 부탁해달라고 당부했다.

오후시간은 더디게도 지나갔다. 오후 다섯시 반쯤 되여 딸애로부터 친구들과 렬차승무원의 도움으로 고속렬차에 무사히 올랐다는 문자가 왔다. 직행고속렬차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온종일 마음을 지지눌렀던 돌덩이를 부려놓은 듯 막혔던 숨이 활 나왔다.

‘이젠 됐어, 집에만 오면 되는 거야…’

그날 저녁 열시쯤 기차역에 당도하여 사업일군을 찾아 신분증을 내밀고 딸애가 다리가 골절되여 오게 되는데 렬차가 도착하면 내가 직접 승강장안으로 들어가 마중할 수 없는가 문의했더니 고맙게도 흔쾌히 나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기차가 드디여 도착했다. 렬차문이 열리고 렬차장의 도움을 받으며 쌍지팽이를 짚고 렬차문을 내리는 딸애를 마중하는 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쌍지팽이를 처음 해보는 거라 서툴기도 하거니와 겨드랑이가 아프다면서 몇걸음 걷지 못하고 쉬여야 했다. 원래는 휠체어를 빌리려 했는데 출입구가 가까워서 필요 없을 거라고 한 관리인원의 말을 들은 것이 잘못이였다. 렬차에서 내려서 보니 출입구까지 150메터도 더 되였다. 딸애가 탄 기차가 마지막 기차라 역내의 공작인원들도 마무리 작업을 하던 차여서 시간을 다그치기 위해 나는 딸애를 둘쳐업었다. 허나 키가 168센치메터나 되는 다 큰 딸애를 업으니 얼마 못 가서 숨이 차서 더는 걸을 수 없었다.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는데 역무일군이 차마 보기가 안되였던지 나 대신 딸애를 둘쳐업고 검표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고맙던지…

기차역 광장을 가로질러 거기에 대기하고 있던 고종사촌형의 차에 올라 집까지 도착했다. 내가 사는 아빠트가 4층인지라 워낙 평소에도 무릎이 아프고 요추간판돌출로 하여 층계에 오를 때 쉬염쉬염 걷던 나였지만 딸애를 업고 한계단 한계단 오르다가 쉬고 하면서 끝내 집문 앞에 이르렀다. 아픈 딸애가 드디여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의 숨도 그제야 활 쉴 수 있었다. 딸애를 씻기고 먹이고 잠자리에 눕히고 이것저것 뒤거두매까지 마치고 나니 열두시가 가까웠다. 나도 잠자리에 눕고 나니 언제든지 기억에 남을, 길기만 했던 오늘 하루가 마음고생과 육체적인 아픔을 참으면서 더디게 보낸 하루가 아니였나 생각되였다. 래일부터는 어떻게 딸애를 도와 무더운 삼복철 더위를 이겨내면서 골절된 다리를 치료해야 할가는 생각과 함께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위챗을 통해 딸애의 골절소식을 한국에 있는 안해에게 알렸다. 혹시 놀라기라도 할가 봐 차분하게 소식을 전했지만 안해는 너무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혼자 감당하기 힘들면 언제든지 귀국하겠다고 했다. 이러는 안해를 나는 마침 방학이 멀지 않아 내가 청가를 맡고 집에서 딸애를 돌보면 된다고 안해의 마음을 도닥여줬다.

이렇게 딸애를 간호하는 생활이 드디여 시작되였다. 뼈를 잇는 데 좋다고 갈비탕도 끓여서 먹이고 오이씨가루가 좋다는 말을 듣고 인터넷으로 한박스나 주문했으며 첫 한달을 침대에 누워 거의 꼼짝할 수 없는 딸애를 위해 음식 메뉴를 정하고 솜씨 없는 재간을 부리면서 입맛에 맛는 여러 음식은 물론 여러가지 과일을 매일 바꾸면서 간식으로 먹였다. 전에는 보통우유를 먹으면 배탈이 나서 먹기를 꺼려하는 것을 념두에 두고 이번에는 고칼슘우유를 사서 주기도 했다. 혹시 무더운 날씨에 다리에 물집이라도 생길가 봐 사흘에 한번 꼴로 석고를 감았던 붕대를 풀고 물티슈로 조심조심 다리를 닦아내고 바람을 통하게 한 다음 다시 석고를 고정시키고 붕대를 감았다. 딸애의 골절소식을 알고 혹시 걱정이라도 할가 봐 나는 여러 형제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할빈에서 아들을 도와 한국 음식체인점을 경영하고 있는 둘째 형님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형수님과 함께 한달음에 달려와서 어려움이 없냐고 이것저것 챙겨주기에 바빴고 형수님은 여러가지 딸애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가져왔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북경에서 시골로 와서 피서를 하는 둘째 누님과 자형도 딸애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아침에 물만두를 빚어서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딸애를 보고 용기를 가지고 아픔과 싸우라고 하면서 용기를 줬다. 큰 형님과 셋째 누님도 어떻게 소식을 접했는지 딸애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라면 돈봉투를 전해주었다. 한국에서 로후를 보내고 있는 칠순이 넘는 큰누님도 딸애 때문에 내가 고생이 많겠다면서 마음 따뜻한 문안전화를 자주 보내주었다.

이곳저곳에서 보내오는 따뜻한 온정에 감동되여 내가 고맙다고 하면 첫마디가 우린 가족인데 뭐 그렇게 미안해하냐고 나무란다.

“우린 가족이잖아…”

참으로 언제들어도 정겹고 마음 뭉클하게 하는 말이다. 가족이란 기쁜일이 있을 때는 서로 같이 기쁨을 나누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같이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그것을 행동에 옮기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적극적인 약물치료와 여러 형제들의 도움 덕분이랄가 60여일이 지나 둘째 형님과 함께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니 뼈가 잘 이어졌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석고는 떼여버리고 집안에서 살살 움직이면서 재활치료를 하라고 했다. 젊은 애여서 뼈가 짧은 시간에 잘 이어졌던 것 같다고 했다. 딸애도 어떻게 해서든지 걸어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처음 며칠은 절룩거리며 한발작 한발작 움직일 때마다 땀으로 목욕하다싶이 되더니 얼마 후부터는 많이 좋아졌다.

이렇게 재활치료를 하는 가운데서 딸애의 개학날도 하루하루 다가왔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뼈나 힘줄이 상하면 백날이 돼야 낫는다고 했는데 딸애의 골절정황을 봐서는 100일을 채우기 위해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하는 생각이였지만 아직 완치되지 않은 딸애의 다리를 생각하면 시간이 늦게 흘러 개학이 늦춰졌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그래도 9월 8일 대학원의 개학날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욕심 같아서는 완치될 때까지 쭉 곁에 붙들어두고 싶었지만 딸애는 개학준비에 서두른다.

드디여 학교로 떠나는 날이 되여 부득이 기차역까지 배웅하게 되였다. 검표소까지 배웅하고 더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터라 학교에 가서도 너무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시간이 나는 대로 병원에 가서 다시한번 사진을 찍어보라고 했다. 삼복철 더위를 이겨내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말하자 딸애는 아빠가 고생했어요 한다. 이말 한마디에 모든 힘든 것도 모든 아픔도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로 ‘나는 아빠니까, 우리는 가족이니까…’하고 되뇌이며 딸애의 뒤모습을 향해 손을 오래도록 흔들었다. 부디 건강 하라고… 더는 아프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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