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나들이 □ 박성우

2023-11-24 08:37:05

여태껏 그리고 앞으로도 고향마을을 지키는 마을사람들이 한없이 존경스럽고 고맙고 사랑스럽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열매는 익어가고 뜨거운 가을볕 향기에 풍요가 설레인다. 올해의 가을 하늘은 류달리 푸르고 맑고 높다.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세상이 눈 아래에서 춤을 춘다. 아쉬움 가득해도 푸른 잎은 단풍되고 하얀 구름은 낚시줄 던져 가을을 낚으려는 듯싶다.

금년 추석에 타향살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님 산소를 찾아 고향을 다녀왔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거늘 부모님 산소 및 고향 마을은 이 가을에 어떻게 변했을가 무척 궁금하였다.

고향마을 앞에는 맑은 강이 흐르고 늬연한 언덕이 남쪽으로 아득히 보인다. 더 올라가면 두박산이라는 큰 바위산이 량쪽에 있는데 50~60년대 소학생들이 봄이면 집체적 소풍 장소로 되였다. 그것은 두박산에 올라서면 앞이 탁 트이여 조선 회령이 한눈에 안겨오기 때문이다. 두박산에는 길 잃은 새각시가 호랑이와 함께 살았다는 전설도 있다. 애들은 두박산 소풍에서 바위와 초목이 어울리는 대자연의 순리를 터득하는 교실로 삼았으며 자연처럼 성장하리라는 결심도 다졌다.

서북쪽에는 서래골에서 흘러내리는 강이 있는데 동으로 십리 흘러 두만강에 합류한다. 물이 맑고 물에 광물질이 많아 마을사람들은 모두 그 강물을 길어 먹으며 살았다. 여름이면 온 마을 남녀로소 모두가 매일이다싶이 한낮이면 목욕하며 흙먼지 땀을 씻군 하였는데 몸속의 더러운 때도 말끔히 씻어버리는 기분이였다.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하면서 싸움 한번 없이 대대로 화목하게 살아왔다. 70년대말에 큰 저수지가 건설되였는데 저수지 맑은 물과 바위는 서로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어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군 한다. 마을 뒤산은 ‘독수리바위’, ‘송곳바위’ 등 바위들이 서북쪽으로 천여메터 늘어서있는데 어릴 때 늘쌍 그 바위 우에 올라가 놀았었다. 애들은 바위꼭대기에 올라서서 마치 장군이나 영웅이 된 것처럼 목청을 다하여 손나팔을 하고 “내가 제일이다!”하고 목청껏 소리질렀다. 그랬다. 바위꼭대기에 올라서면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군 하였던 것이다. 오늘도 ‘독수리바위’를 쳐다보노라면 경건함을 금할 수 없다. 독수리바위 중간에는 큰 동굴이 있는데 산비둘기나 박쥐들의 삶터로 되여있다. 이 바위 동굴로 인해 공암동(孔岩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옛날부터 우리 고향마을은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이 있었다. 이런 작은 산골에서 어느 한해에 대학생이 한꺼번에 세명이나 나왔으니 말이다. 우리 집만 해도 큰 형님, 둘째 형님, 나 그리고 막내동생이 이곳에서 대학에 붙었다. 집에서 중학교까지 10리나 되였는 데도 말이다. 아마도 맑은 시내물이 우리를 총명하게 하지 않았을가. 아마도 푸른 나무숲이 튼튼하게 키워주지 않았을가. 아마도 뒤산 바위가 용기를 주고 굳센 기개를 키워주지 않았을가.

아침 7시에 출발하여 한시간 반 달리면 고향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스치는 가로수와 밭, 산과 들판을 보노라니 고향길의 정겨움이 확연히 감겨들었다.

지금은 집집마다 바자에 열콩들이 주렁졌을가, 터전마다 토실토실 감자가 영글고 집 주위에 심은 사과배가 주렁졌을 것이다. 차에 앉아 가는 동안 내 눈앞에는 풍요로운 정경이 펼쳐지고 있어 가슴이 설레기만 하였다.

고향마을에 도착하여 들먹이는 마음으로 차에서 내려보니 웬걸 마을의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마을 전체가 2년 전부터 관광지 건설 대상에 들어 낡은 집들은 모두 허물어지고 유독 우리가 살던 옛집만이 덩그러니 외롭게 앉아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내가 열살 때부터 살던 집이여서 오늘 추억의 기념을 남길 수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 고향집에는 나의 몇십년간의 희로애락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다. 그런데 옛날의 벼짚지붕은 벗겨지고 붉은 기와를 얹어 집이 한결 산뜻해보였다. 고향이 변했다. 참신한 모습으로 변했다.

뒤뜨락의 사과배나무에 사과배 몇개가 달려있었다. 나는 냉큼 하나를 따서 한입 베여물었다. 껍질이 땅땅하고 두터웠지만 속살은 새하얗다. 이것이 고향이다. 고향마을의 고향정은 이 사과배 속살처럼 깨끗하고 다정하다.

이 고향집에서 다른 형제들은 모두 도시로 빠져나가고 셋째인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었다. 나한테 시집와서부터 15년 동안 부모님을 모시느라 안해가  숱한 고생을 하였다. 당시 나는 어느 소학교에서 교장 노릇을 하느라 집일은 별로 돌볼 새가 없어 터밭 가꾸기 등은 안해가 도맡아하였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중풍 세번째 만인 1988년 10월에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위암으로 오래 앓다가 1990년 2월에 세상을 떴다. 나이 많고 병든 시부모의 똥오줌 받아내며 안해가 흘린 눈물인들 얼마였으랴. 안해한테 고마움은 죽어도 못 갚을 것이다.

올해 추석엔 더우기 장춘에 계시는 81세 고령인 큰누님과 할빈에 계시는 78세 되는 둘째 형님 내외가 동참하여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 어머니 산소는 마을 뒤산 기슭 양지쪽에 모셔져있는데 고향집과 백여메터 정도 떨어져있다.

18세부터 대장쟁이를 하신 아버지는 쇠를 다루는 재간이 린근 십리안에서 으뜸이였다. 수십년간 아버지는 쇠망치질로 돈을 벌어 큰 형님, 둘째 형님, 나와 막내동생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두 누님을 시집 보냈다. 낮에는 마을 대장간에 출근하시고 아침저녁으로 집에서 우철을 신기는 등 일을 벌려 돈을 모으셨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잉태했을 때 담배곰방대를 쥐고 있는 꿈을 꾸었다며,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어머니 곁에 있을 거라 늘쌍 말씀하셨는데 진짜 어머니 태몽 대로 된 것이다. 셋째인 나는 부모님을 림종 때까지 모셨다는 것으로 항상 자부심을 가진다.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 뜨자 비로소 38살의 나이에 내가 28년 동안 살아온 고향집을 떠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항상 제힘으로 벌어먹고 남을 등 쳐먹는 노릇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쇠망치처럼 살라고 자식들을 일깨워주셨는데 나를 견책하는 쇠망치소리는 지금도 귀에 뚱땅뚱땅 들려온다. 어머니 또한 늘쌍 남을 잘 도우며 착하게 살라고 몸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시면서 우리를 타일렀다. 배려심은 어머니로 인해 나의 가슴에 싹트게 되였다. 부모님의 계몽교양으로 인해 나로서도 부정한 생각이 생길 때마다 쇠망치로 쳐낼 수 있었고 원칙을 견지하고 강인한 성격과 배려심을 많이 키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배려심은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이다. 금전재물을 들여 남을 배려할 수 있을뿐더러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도 남을 배려할 수 있지 않는가. 배려가 곧 사랑이고 행복이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할 때마다 나는 큰 행복감에 빠지군 한다.

벌초를 시작하니 모두 늙은 몸이였지만 약 40분이 걸려 다 할 수 있었다. 양지쪽이라 가시풀이 어찌도 많은지 온몸이 가시천지라 가시를 떼여내는 데도 한참 걸렸다. 산소가 깨끗해지니 아버지 어머니 사랑이 한몸에 안겨오는 듯 후더워났고 부모님들이 무지하게 그리워났다.


어머니 묻힌 곳엔

잔소리 피여나고

아버지 잠든 곳엔

엄한 욕 비꼈는데

봉분을 품은 고향산

싫던 소리 그립다.


산소에서 내려와 마을을 돌아보았는데 사방 50여메터씩 되는 낚시터를 건설중이라 아직은 휑뎅그레 했다. 그러나 관광지건설도를 보노 라니 려행지로 거듭나 려행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 새로운 정경이 떠오르며 가슴이 벅차기 시작했다.

건설계획에 따라 마을사람들에게 뒤산기슭에 호마다 50평방짜리 새집을 지어줬는데 집들이 아담하게 한곳에 있으니 더욱 단란해보였고 마을사람들도 얼굴에 행복의 기색이 어리여 싱글벙글하였다. 여태껏 그리고 앞으로도 고향마을을 지키는 마을사람들이 한없이 존경스럽고 고맙고 사랑스럽다. 이제 명년 가을쯤이면 유람지 건설이 완공될 수 있다고 한다. 그때면 떠났던 고향사람들도 너도나도 다시 고향을 찾아올 것이다. 짜개바지 친구 창수랑 덕칠이 무척 보고 싶고 풋사랑을 속삭이던 향순이도 지금 어디서 살고 있을가 무척 궁금하다. 변모한 고향마을은 큰 저수지도 있고 하니 유람객들이 몰려들어 벅적거릴 것이다. 가을은 랑만이고 열정이다. 내 청춘을 바쳐온 시골 고향, 꿈에서도 나는 거기서 즐긴다.


수확을 알리는 향

가을안부 전한다

알알이 영근 만큼

희열을 알리는데

수갈래 모였던 길들

떠날 차비 서두네.


가랑잎은 바람에 날려갔어도 고향혼은 나무와 함께 고스란히 남겨져있고 고향의 앞 언덕 이깔수림 뒤산과 바위 그리고 맑은 강물은 변함없이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도 고향이 새롭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쁨에 겨워 웃고 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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