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서정 □ 김춘식

2023-12-01 08:24:43

가을이 깊어가니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다. 한국의 산과 도시마다 온통 울긋불굿 단풍으로 물들었다. 하긴 11월에 접어들었으니 마침 단풍이 절정에 오른 때이다. 아, 요 며칠에 만사를 제쳐놓고 단풍구경을 한번 떠나야겠구나! 나이가 들수록 봄꽃보다 가을단풍이 아름다워지는 모양이다. 요즘 들어 부쩍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이 며칠 비바람이 자주 불어치니 나무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다른 건 제쳐놓고 단풍구경 한번 떠나볼 일이다. 지난 3년간 발이 많이 아픈 관계로 등산을 할 수 없다 보니 단풍구경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 많은 유감을 남겼는데 이 가을에는 꼭 한번 제대로 단풍구경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하, 그런데 이걸 어쩌지? 아픈 발을 수술한 지도 어언 반년이 되였건만 산을 오르내리기는커녕 평탄한 길도 오래 걷기가 힘들다. 그러니 아직 산에 오르자면 너무 무리였다. 다만 봄꽃 못지 않게 아름다운 가을단풍도 꽃처럼 한순간이라 까딱하면 절정을 놓치기 십상이여서 때를 놓치지 말아야 했다. 재빨리 스러져가는 게 단풍인지라 어정거리다 보면 자칫 꽃보다 아름다운 이 계절의 단풍을 놓칠 수도 있기에 오늘 내가 서둘러 집을 나선 것도 그 때문이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눈길 닿는 곳마다 가을이 묻어난다. 그 어딜 가나 가로수요 숲이 우거진 이 동네인지라 지금 어디에선들 울굿불굿 단풍 든 나무들을 볼 수 없으랴. 지금 내 눈에 산이면 산마다 숲이면 숲마다 단풍명소이다. 가로수 길을 걷거나 가까이 있는 공원만 찾아도 가을을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어제 오늘은 부평중앙공원, 인천중앙공원 등 도심 속의 공원이나 도심 속에 자리한 숲을 찾아다녔는데 도심 속에 자리한 공원이나 숲에서도 단풍의 정취를 얼마든지 맛볼 수 있었다. 산의 화려한 풍경과는 비할 바가 못되지만 숲속에서 무르익은 늦가을의 멋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다. 우를 쳐다봐도 땅을 내려다봐도 온통 울굿불긋하다. 도심 속 공원이나 숲에는 벤취까지 줄느런히 놓여있어 가끔가다 앉아 쉬기도 하니 단풍구경에 과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게는 제격이다. 아픈 발 때문에 먼길을 떠나기 조심스러운 요즘이다 보니 가까이에 큰 공원이 있다는 게 새삼 큰 축복으로 느껴진다.

만추홍엽, 늦가을의 단풍은 확실히 시적이다. 산과 들과 도시를 울긋불긋하게 수놓은 단풍은 한폭의 그림과 같다. 울긋불긋 화려한 빛갈로 물든 들과 산과 도시를 바라보면 절로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그러기에 단풍은 예로부터 많은 시문의 소재가 되고 있다. 동서양의 이름 있는 시인들은 가을단풍에 대한 많은 시를 남겼다.

단풍을 읊조린 한시 가운데 내가 가장 애송하는 것은 당조의 두목(杜牧)이 지은 <산행(山行)>과 청조의 장초(蒋超)가 지은 <산길 걸으며 단풍을 읊노라(山行咏红叶)>이다.


“저 멀리 차거운 산 비탈길 올랐더니

흰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이노라

가던 수레 멈추게 한 건 아름다운 황혼 단풍

서리 맞은 단풍잎 2월의 꽃보다 아름답구나.”


만당(晚唐)을 대표하는 명시로 널리 알려진 두목의 <산행>이다. 이 시는 가을단풍을 노래한 절창으로 불리운다. 가을이 깊은데 산을 높이 올랐으니 단풍은 더욱 선명하고 화려한 색의 향연을 연출했으리라 여겨진다. 이 시에는 석양빛에 반짝이는 단풍잎을 아끼고 즐기는 마음이 은은하게 배여있다. 단풍 삼매경에 흠뻑 빠져든 시인은 2월 봄꽃보다 더 아름답도록 붉은 단풍에 매료되여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노라 고백한다.

이 시구는 1995년 11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강택민 주석이 청와대 경내를 산책할 때 한국의 가을 풍경을 찬미하면서 소개한 구절이기도 하다. 산하를 곱게 물들인 가을단풍이 무척 인상적이였나 보다. 중국도 단풍이 아름다운 나라라면서 “서리 맞은 단풍잎, 봄꽃보다 아름다워라”를 읊조렸다. 이에 한국의 각 방송사들이 다투어 이를 보도했는데 이로하여 이 시구는 한국인들도 즐겨 인용하는 단풍시구로 되였다 한다.


“그 누가 붓 잡아 록색 숲에다 단청칠을 했던고

푸른 하늘 흰구름 아래 홍옥이 찬 향기 머금었구나

조물주가 술 취해 붓 그러쥐고

가을을 봄으로 그렸네.”


청나라 장초가 읊은 <산길 걸으며 단풍을 읊노라>도 한시에서 대표적인 단풍시의 하나이다. 짙푸른 가을하늘과 선홍빛 단풍의 선명한 색조 대비가 인상 깊을뿐더러 조물주가 술에 취해 붓을 휘둘러 봄꽃을 가을나무에다 잘못 그려넣었다는 발상이 기묘하다.

공원 산책로에는 느티나무, 참나무, 벚나무, 은행나무가 줄 서있다. 느티나무 단풍을 보노라면 참 신기롭다. 노르스름하게 물들다가 차츰 그 색갈이 주황색으로 바뀐다. 한 나무인데도 가지마다, 잎마다 단풍이 드는 때와 색갈이 다르다. 이렇게 나무들이 나름 대로 가을을 아름답게 연출한다. 오색단풍은 많은 사람을 설레게 하고 길을 멈추게 한다. 은행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는 찰칵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젊은 녀인들이 자리를 바꿔가며 노란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을단풍은 어찌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가? 아마도 가을이라는 계절과 함께 화려하게 변하는 그 색갈 때문이리라.

단풍이 들 때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것이 봄에 꽃을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단풍놀이란 말이 있는데 사람들은 단풍이 들면 산으로, 들로, 공원으로, 숲으로 단풍놀이를 가 장만해간 술과 음식을 들면서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며 가을의 정취를 즐긴다. 번잡한 생활에서 벗어난 즐거움 그리고 이 나무 저 나무 바라보는 한가함으로 단풍지는 늦가을 산뜻한 산책길을 거니는 것도 또한 별멋이 아닐가!

공원 안쪽에 들어서면 불타는 듯 빨간 단풍이 유난히 돋보인다. 이때 피뜩 떠오른 것이 백거이의 단풍시이다.


“차거운 산 시월의 아침

서리 맞은 나무잎 일시에 바뀌였다

타는 듯해도 불이 난 건 아니요

꽃핀 듯하지만 봄이 도래한 건 아니라네

가지런히 이어져 짙붉은 장막을 펼친 듯

마구 흩날려 붉은 수건을 자른 듯

단풍 구경하려고 가마 멈추고

바람 앞에 선 이는 우리 둘 뿐이려니.”

―‘두목의 단풍시에 화답하다’


서리를 맞고도 붉게 물든 단풍은 인생의 온갖 풍상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한 삶을 살아낸 황혼의 인생을 련상시킨다. 나도 지금은 단풍 같은 로년기에 서있다. 하다면 내 삶의 단풍은 어떤가? 어떤 색으로 물들었을가? 자신에게 묻고 싶기도 하다.

가을이 불타고 있다. 나도 단풍이 되고 싶다. 내 삶이 저물어갈 때 단풍나무잎처럼 저리 빨갛게 화려하게 물들지 못한다면 은행나무잎처럼 저리 노랗게 은은하게 물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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