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해서인지 나에게는 헌책을 찾아 시장골목을 누비며 거니는 습관이 있다. 예전에 중국에 있을 때는 일요일마다 시장거리를 골목골목 누비며 헌책방이나 헌책을 파는 로천매대를 찾아다녔다.
퇴직 즈음에 내가 살고 있던 상지 시내에는 일요일마다 장터가 서는데 이 골목 저 골목에 방수포를 깐 바닥에 헌책들을 늘여놓고 파는 헌책 보따리장수와 헌책들을 한 트럭씩 날라와 로천매대에서 파는 로점상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런 곳의 책은 값이 퍼그나 싼 데다가 이미 절판되여 구하기 힘든 오래된 책들도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보물고와 같았다. 원가가 인민페로 20~30원씩 하는 책들을 이런 곳에서는 5원에 한권, 10원에 3권을 살 수 있었다.
어떤 로점상은 서점들의 재고를 전문 날라와서 파는데 서점 매대에서는 몇십원씩 하는 책도 여기서는 10원 안팎이면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책들을 보고 있으면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어 좀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독자》, 《미문(美文)》, 《수필》 등 잡지를 즐겨 보았는데 그 몇해 동안 시장 로천매대에서 이런 잡지들을 수백권 사들였다. 비록 과월호들이지만 그 읽을 가치가 여전하고 또 값도 아주 싼바 한권에 1~2원밖에 받지 않았다. 게다가 말이 헌책이지 대부분 상태가 좋았고 어떤 것은 새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상지 시내에 있는 내 집 서재의 책 대부분이 로점상들에게서 산 것이다.
한국에서는 헌책방거리를 찾기가 좀 어렵다. 내가 여직 다녀본 헌책방거리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헌책방거리, 서울 동묘 헌책방거리 그리고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 뿐이다.
이중 내가 제일 먼저 찾아본 곳은 서울 청계천 헌책방거리인데 서울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 8번 출구 바로 앞 청계천 오간수교를 건너면 있다. 2016년만 해도 손때 묻은 책이 가득한, 헌책들이 곳곳에 눈에 띄는 헌책방거리는 제법 활기를 띠고 있었다. 책의 종류도 많거니와 일반 서점에서 구하기 힘든 책들이 가득하여 헌책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였다. 돋보기를 끼고 책장 가득 빼곡한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백발의 로인이 있는가 하면 어린애들을 데리고 와서 만화책을 고르는 젊은 애엄마들도 있고 점심시간에 잠시 휴식 삼아 이 거리를 찾아와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린근 직장인들도 있었다. 손님들은 이 책방 저 책방에서 책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중엔 독서삼매경에 빠진 이들도 보였다. 여기서는 책 고르는 재미와 기쁨을 보너스로 얻을 수 있다. 이 책 저 책을 매만지며 고르고 고르던 끝에 원하던 책을 싼 가격에 구입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이 헌책방거리에서는 수시로 볼 수 있었다. 여기에는 눈에 띄게 색바랜 고서도 많았는데 100여년 전에 출간된 한시집 등 진귀한 고서들과 출판사가 문을 닫아 절판된 책도 다량 확보해두고 있었다. 이렇게 여기에선 희귀본이나 값진 고서가 때때로 흘러나와 책 수집가들도 많이 모여든다고 한다. 아무튼 헌책시장의 가장 큰 매력은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을 찾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누군가 “꽃은 떨어지고 사라지지만 헌책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명언으로 꼽는다. 누구에게나 나름의 인연을 가진 보물 같은 책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때 한국어로 번역된, 중국작가들이 쓴 책을 여러권 샀다. 그중에는 전부터 구하려던 조정문의 《책향기에 취하다》, 손립군의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등도 들어있는데 그 책들을 발견했을 때의 흥분을 어이 잊으랴. 꼭 돈으로 값어치가 있는 책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찾은 소중한 책이라면 그 책이 보물이다.
한번 다녀간 헌책방이 생각나는 날이 가끔 있다. 큰 건물 지하에 있는 기업형 중고서점 말고 길 걷다 만나는 허름한 헌책방,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고 책 먼지가 폴폴 날리는 그런 헌책방 말이다. 대형 서점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서점들이 책 류통을 독과점하고 있지만 헌책방만이 뿜어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가치가 내 발길을 잡아끌군 한다. 지난주 토요일 안해와 함께 서울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다시 찾았다. 아니, 내가 헌책방거리로 기억하고 있는 동대문 평화시장 앞 인도를 걸었다. 8년 전 이 거리에는 헌책방도 많았고 사람도 많았다. 허나 이젠 그곳을 모자가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기다랗게 펼쳐진 평화시장 1층에 들어선 헌책방은 대략 세여보니 10여개 뿐이였다. 헌책방들은 모자가게들 사이에 가끔 한곳씩 끼여있었는데 한파탓인지 아니면 주말이라서 그런지 그나마 문을 열지 않은 헌책방도 더러 있었다. 게다가 책 구하러 나온 사람보다 책방 주인이 더 많았다. 마음 편하게 책을 구경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였다. 혼란스러웠다.
“찾는 책 있나요?”
기웃거리는 책방마다 서점 주인이 말을 걸어왔다. 사실 꼭 사고 싶어서 찾는 책이 여러권 있었다.
“《청나라 귀신요괴전》, 《취옹 풍경을 마시다》, 《천고의 명의들》,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 《맛 좋은 삶》, 《인간초목》, 《고목나무 속 전설》, 《나무, 살아서 천년을 말하다》.”
나는 사전에 집에서 미리 책 이름을 적은 종이를 건네며 물었다
“혹시 이런 책들이 이 책방에는 있을가요?”
이중 앞의 몇권은 중국의 책을 한국에서 번역한 것인데 이미 절판상태여서 근래 중고서점에서도 온라인에서 구매하지 못한 책들이라 근근히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밖에 없는가 하면 어떤 책은 아예 도서관에도 대형 서점에도 없다.
헌책방 주인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저었다.
“한권도 없네요.”
허구프게 웃으며 대답하는 이도 있었다.
큰 기대를 걸고 큰 마음을 먹고 오랜만에 이 거리를 찾았는데 이 많은 책방에 이 책들이 한권도 없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파 속에 꼬박 한시간이 걸려 이 먼곳까지 헛걸음을 한 게 여간 맹랑하지 않았다. 하긴 여기에 오면 수요되는 모든 책들이 있을 것이라는 그 생각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딴 책들을 찾아볼 기분도 나지 않아 아예 안해를 동반해 옷시장을 거닐었다. 물론 여기까지 동반해온 안해의 로고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중국 고대 선비들의 생활사》는 8년 전에 이곳에서 샀는데 이듬해 중국에 들어가면서 가져가서 부득불 또 사야 했지만 절품상태라 구하지 못했다. 혹여나 하는 생각에 어제 퇴근길에 교보문고에 들려서 사정얘기를 했더니 먼저 예약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예약금을 냈더니 불과 하루 만에 책을 이미 구해 배송중이라는 문자메시지가 들어와서 참으로 반갑다.
내가 두번째로 찾아본 헌책방거리는 서울 동묘 헌책방거리이다. 서울1호선 동묘역 3번 출구 앞으로 나오면 바로 볼 수 있다. 동묘 헌책방들은 규모도 크고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구하지 못하는 책도 간혹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몇해 전에 이곳에 왔을 때 이곳에서는 점포 밖에 좌판을 깔고 한권에 한화로 천원씩 헌책들을 팔았는데 오래되고 낡은 책들이 대부분이였지만 가끔씩 깨끗하고 좋은 책을 천원에 득템하기도 한다. 한권에 천원이라니? 나는 보석을 찾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날 나는 그곳에서 만원짜리 한장으로 한권에 한화로 천원씩 책 10권을 골라서 샀다. 대형 서점에서 새 책 한권에 만여원씩 하는 데 비하면 책을 공짜로 얻은 셈이라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날 거기에는 로년고객들이 꽤나 많은 축이였는데 다리가 불편한지 한 로인은 쌓여있는 책 우에 앉아 한참 책을 읽더니 마음에 드는 책을 골랐는지 주머니에서 천원짜리 한장을 꺼내는 것이였다.
내가 두번째로 동묘헌책방을 찾은 것은 지난해 11월말의 어느 일요일였다. 6년 만에 다시 찾은 그날따라 포근했던 바람이 갑작스레 매서워졌다.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에도 동묘시장 헌책방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지금은 규모가 큰 헌책방 세곳만 남았지만 불과 2년 전만 해도 몇곳이 더 있었는데, 모두 빈티지샵으로 바뀌였다고 한다. 서점 안쪽엔 빽빽이 책들이 꽂혀있고 미처 자리잡지 못한 책들은 바닥에 쌓여있었다. 서점 안에 구비된 책들은 비교적 깨끗하고 최신 책들이 많았다. 매장 안은 두 사람이 어깨를 스치며 지나기에도 좁아보였다. 그래도 어느 헌책방이나 어김없이 한두사람은 보물찾기에 여념이 없다.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책더미를 살펴보는 사람들. 원하는 책을 바로 찾기는 힘들지만 차분히 책장을 훑다 보면 반드시 보고 싶은 책이 발견되군 한다. 나는 그날도 마음에 드는 책 두권을 사들고 기분 좋게 자리를 떴다.
내가 세번째로 찾은 헌책방거리는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이다. 지난해 6월 말의 어느 토요일, 그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배다리 헌책 축제’를 한다는 기사를 보게 되였다.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라면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한국 3대 헌책방거리로 불릴 만큼 번성한 곳이 아니던가? 그러찮아도 이태 전에 인천시청 쪽으로 이사를 온 후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나는 점심을 대충 챙겨먹고는 가방을 메고 나섰다. 인천1호선에서 서울 1호선으로 갈아타고 동인천역에서 내려 중앙시장 쪽으로 쭉 직진하다가 배다리 지하상가 2번 출구로 나오니 바로 헌책방 골목이였다.
말이 축제이지 생각 밖에도 내가 처음 접한 이미지는 기대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썰렁함이였다. 자료에 의하면 웬만한 인천사람들에게 배다리 하면 헌책방골목으로 대변될 만큼 유명했다. 모든 것이 궁핍했던 시절, 배움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학문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던 곳이 바로 배다리 헌책방골목이라고 한다. 한때는 40여곳의 헌책방들이 이 일대 거리를 꽉 채우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달랑 대여섯곳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동대문 청계천 헌책방거리나 동묘시장 헌책방거리에는 길가에 쭈욱 늘여놓고 책을 파는 가게도 있던데 여기에는 전혀 그런 곳이 없었다. 규모로 보면 여지없이 작았다. 축제날이라서 그런지 몇 안되는 책방에 그래도 고객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서점 입구 주위엔 손때 묻은 헌책들이 여기저기 쌓여있고 서점 안을 들여다보면 어마어마한 량의 책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종종 찾아가는 알라딘 중고매장의 규모와 쾌적함과는 또 다른 오래된 헌책방만의 특유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대형 서점 만큼은 아니지만 분야별로 헌책들을 분류해서 관심 있는 분야의 헌책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작은 공간에 오밀조밀 놓인 빛바랜 책들이 주는 느낌이 따뜻했고 여기저기서 남다른 헌책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손님들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빽빽하게 채워진 좁은 통로에 서서 옆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보물’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한 책들, 나무 사다리 그리고 세월 묻은 옛날 책 냄새 한가득한 책방들…
헌책방이란 말 그대로 누군가 썼던 책을 저렴한 가격에 파는 곳이다. 헌책방에서는 오래된 책이 주는 편안함과 세월의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이 책방 저 책방에 마음에 드는 책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도 나는 욕심을 다잡고 책을 세권만 샀다.
나는 헌책방에 갈 때 특정된 책을 마음에 두기보다 그저 ‘오늘은 무슨 책이 있을가’ 하는 느슨한 생각을 가지고 갈 때가 많다. 그렇게 책장을 훑어보다가 어떤 책이 문득 자기를 끌어당기면 그 책을 산다. 가끔은 특정된 책을 목표로 삼아 헌책방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것은 내가 찾는 책이 서점에서는 팔지 않는, 절판된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헌책방, 동네 책방, ‘알라딘’에 가는 걸 좋아한다. 구매할 책이 없더라도 심심하면 책방에 들려 눈에 띄는 책을 펼쳐보다 괜찮은 게 눈에 띄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별 수확 없이 책방을 나온다. 목적 없이 찾은 책방인데도 책을 구매하지 않으면 마음에 걸린다. 책방을 나서면서도 계속 뒤돌아보게 된다. 뭘 찾는지 모르면서도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어쩌면 스스로도 이상하다. 어지럽게 쌓인 책더미 속에서 골동품 같은 책을 싸게 만날 수 있으니 이게 바로 헌책방이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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