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단상□ 허명훈

2024-05-17 08:09:49

인간은 이 세상에 태여나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태를 묻고 자란 고향이 있다. 동년시절, 고향에서 동년의 아름다운 꿈과 리상과 포부를 품고 자라면서 고향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과 향수가 늘 마음 한구석에 짙게 깔려있다. 성인이 되여서도 마음속에 숨겨놓은 짝사랑에 황홀한 가슴을 태웠고 첫사랑에 빠져 행복에 도취되여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살기도 한다. 그러다가 자의, 또는 타의로 고향을 떠나 이국이나 타향에서 몇년 지어 몇십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고향이 자리잡고 있어 항상 고향을 그리며 살게 된다.

나는 지난 90년대말 안해와 함께 한국에 가 10년을 뼈를 깎이고 기름을 짜이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지금은 연해도시 청도에다 아빠트를 마련하고 자그마한 슈퍼가게를 경영하며 살고 있는 나는 대양을 누비다 회귀하는 연어처럼 안해와 함께 25년 만에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을 찾아 음력설을 보내려고 마음을 정했다. 그동안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오랜 세월을 살면서 인편으로, 또는 풍문으로 고향이 어찌어찌 변했다는 소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그 오랜 세월 만큼 고향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감도 컸다. 그래서일가, 유년시절 반에서 원족을 간다고 며칠 달뜬 마음으로 잠을 설치듯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마음이 먼저 맨발로 고향으로 달려가 추억을 더듬는다. 세상 만물이 멈춘 듯 고요한 밤, 벽에 걸린 벽시계 추가 왔다 갔다 하면서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에 생각의 꼬리를 자르려고 똑딱똑딱 따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핸드폰의 알람소리에 혼곤한 잠에서 깨여나 아침을 맞았다. 약간은 흥분된 듯한 마음을 가라앉혀 아침을 챙겨 먹고 일찌감치 청도 공항에 도착해 예정된 시간에 비행기에 탑승했다. 몸은 비록 아직 비행기에 있지만 내 마음은 벌써 유년시절 짜개바지 친구들과 하루에도 수십번도 미역 감고 고기잡이를 하던 고향의 버들방천을 누비고 있었다. 옛날 같으면 청도에서 고향으로 가자면 기차로 2박3일이 걸렸지만 지금은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반이면 가목사시 공항에 도착하고 고속렬차를 타도 1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나는 가목사 공항에 내려 다시 뻐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1시간 푼히 달려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4시간 만에 고향의 동구 밖에 내려 25년 만에 고향마을을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내가 나서 자란 고향마을은 100여호가 되나 마나한 작고 아담한 마을이였다. 마을과 70리 되는 곳에 흑룡강에서 세번째로 큰 향양산저수지가 있어 그 물을 받아쓰며 벼농사를 지었는데 여름내내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도 가뭄 걱정 없이 물을 흔하게 쓰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게다가 토지가 많고 사질 땅이여서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쌀맛 또한 현에서도 으뜸이라 시장에 가서도 우리 마을 쌀은 다른 마을보다 높은 가격을 불러도 불티나게 팔렸다.

깨끗하고 맑은 저수지 물이 마을 가운데로 흘러지나 여름이면 강가에는 마을 아낙네들의 빨래방치 소리가 그칠 새 없었고 미역 감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강에는 물 반, 고기 반이라 우리 개구쟁이들은 하학종이 울리기 바쁘게 숙제는 뒤전으로 하고 강가에 나가 미역을 감았는데 그때마다 손바닥만한 붕어가 발에 밟혀 꿈틀거렸고 풀이 우거진 곳에 손을 넣어 더듬으면 팔뚝만한 잉어와 붕어, 메기가 욱실거렸다. 한참을 잡으면 버들가지에 한뀀을 잡을 수 있었는데 날마다 밥상에 생선 반찬이 올라오는 것은 물론, 말리웠다가 겨울 반찬으로 먹기도 했다. 어머니들은 또 생선을 마을과 이웃하고 있는 농장시장에 갖고 가 팔아서 생활비에 많이 보태기도 했다.

내 고향은 시골마을의 소박한 인심과 인정이 넘쳐나서 린근에 살기 좋은 동네라 소문이 나 타지방에서 이사호들이 륙속 들어오면서 고향마을은 급기야 200여호에 1000여명이 넘는 큰 마을로 되였다. 원래 1개 소대였던 마을이 4개 생산대로 불어났고 학생수가 150명이 넘어 마을에 고중 학년까지 있었다. 마을이 크니 인재도 많이 배출했다. 새로운 대학입시 제도가 나오면서 일반 대학, 중등전문학교에 도합 300여명의 대학생을 배출했는데 그 속에는 북경대학, 복단대학 입학생도 있었다. 고향마을은 1989년부터 해마다 현급, 가목사시급 문명촌의 영예를 지녔고 1990년에는 성급 문명촌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후 개혁개방과 더불어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연해도시로, 외국로무로 마치 보물이 터지듯 제반 조선족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는데 그 붐은 내 고향마을을 비껴가지 않았다. 고향사람들은 너도나도 연해도시와 외국 진출 행렬에 떨쳐나섰고 고향은 급기야 160여호에 900여명의 인구가 마치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면서 마을에는 50여호에 100명 인구도 채 남지 못했다. 마을은 졸지에 주인 없는 빈집들이 구석구석 옹송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길손을 흘겨보고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비껴있었다. 마을은 점점 한적해졌고 혹시나 고향이 그리워 찾아온 사람들이 잠잘 자리가 없어 이웃 농장려관을 찾을 정도로 한여름 밤에도 마음이 쌀쌀하고 허허로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고향마을에는 연해도시와 외국 붐에 휘말려들지 않고 고향에 남아 고향을 지키고 고향마을을 건설하려는 보석과도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문명촌의 간판을 내세워 현과 가목사시, 성을 수차례 오르내리면서 200만원의 자금을 끌어와 마을 건설에 앞장섰다. 쑥과 풀이 우거지고 먼지가 풀썩이며 비만 오면 마을 길이 진흙으로 묵사발이 되여 녀자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 못산다던 마을 길을 모두 세멘트 길로 포장하고 길 량옆에는 모두 가로수를 일매지게 심어서 마을 면모를 일신시켰으며 길마다 가로등을 설치해 밤길을 다니기 편해졌다. 그리고 페교된 지 20여년이 되여 잡초로 우거진 1헥타르 되는 학교 운동장에다 공원을 조성했다. 화단을 만들어 꽃을 심고 사과나무, 오얏나무, 살구나무, 단풍나무, 수양버들, 은행나무를 다양하게 심었으며 여러가지 운동기구와 4개의 정자에 벤치까지, 마을사람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과 힐링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2010년에는 무너져가는 초가집을 몽땅 허물고 그 자리에 84가구가 살 수 있는 5층짜리 아빠트 2동과 50여가구가 살 수 있는 3층짜리 아빠트 2동을 건축해 100여호가 안락하게 살고 있다. 200여평의 로인정에는 매일 100여명의 회원들이 모여 취향에 따라 장기, 탁구, 화투, 노래와 춤 등 다양한 활동으로 로후의 삶을 다채롭게 보내고 있다.

속담에 ‘베돌던 닭도 때가 되면 홰 안에 찾아든다’는 말이 있다. 지금 이 아빠트단지에는 지난날 고향을 떠나 연해도시로, 외국으로 돈 벌러 날아갔던 ‘철새’들이 돈을 벌어와 고향마을에다 도시 아빠트 못지 않게 장식해놓고 살고 있고 보금자리가 포근하니 타지방 농호 10호가 ‘철새’ 처럼 날아와 아빠트를 사고 포근한 자기들의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니 강산이 두번 변하고도 남을 25년 만에 몰라보게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장한 고향의 모습을 보니 기쁨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타향에서 살면서 마음속으로만 고향을 담아두고 그리며 살았지 언제 한번 고향의 발전과 건설에 관심과 눈길을 돌리고 자그마한 도움과 힘을 실어주지 못한 린색한 자신이 못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에라도 몸을 숨기고 싶은 심정이였다. 마침 나처럼 오래간 만에 설을 맞아 고향을 찾은 친구들 20여명도 모두 나와 같은 심정이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저마다 호주머니를 털어 30여만원을 모아 마을 건설에 쓰라고 촌민위원회에 기부했다. 우리는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그동안 서로 그립던 정과 덕담을 나누었다. 작은 사랑이 모이면 태산을 이룬다는 말이 있듯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타향에서 살지만 고향사람들과 촌지도부와 서로 일심동체로 똘똘 뭉쳐 앞으로 고향 건설과 발전에 많은 관심과 힘을 보태기로 다짐했다.

그렇다. 고향은 영원한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며 마음의 언덕이다. 하여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아무리 이역만리를 가고 타향에 살아도 언제나 가슴 밑바닥에는 고향이 자리잡고 있고 내 고향만은 언제나 번영 창성하고 나날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기를 축원한다.

  멀지 않은 장래에 고향마을에는 둥지를 떠났던 ‘철새’들과 포근한 둥지를 찾는 외지호 ‘철새’까지 날아들면 고향의 앞날은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에 찬란한 보름달처럼 더더욱 밝을 것이리라 확신하면서 나는 모처럼 고향에서 즐거운 설명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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