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엽이 떨어지는 어느 늦가을의 오후.
간만에 찾아온 따뜻한 날씨에 공원에는 단풍놀이를 나온 사람들로 흥성이였다. 보기 드물게 화창한 날이였다. 호수가에는 나그네 몇이서 화석마냥 앉아있다가 띄염띄염 낚시대를 들어올렸고 그 건너편 잔디밭에는 알록달록한 텐트가 옹기종기 펼쳐져있었다. 가족인 것 같기도 하고 련인인 것 같기도 한 사람들이 어울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살이 나무잎 사이로 스며들고 주변의 푸르름이 자연스럽게 퇴색돼가고 있었다. 구석쪽 그늘진 곳에 네 안로인이 나란히 앉아 해볕쪼임을 하고 있었다.
네 사람은 타지에서 서로 만난 안로인들이였는데 같은 고향이라는 리유로 서로 인연이 되여 주말의 오후마다 모임을 가지게 되였다. 들고 온 시루떡을 사이좋게 나눠먹기도 하고 누군가가 보온병에 타가지고 온 보리차를 뚜껑에 부어 번갈아 마시기도 하면서 한주 내내 묵혀두었던 일들을 꺼내 수다 떨고 있었다.
김씨가 팔목을 드러내더니 누런 팔찌를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 말이요. 내가 고생한다고 이걸 사줬지 뭐요. 손주 둘 보는 게 뭐가 힘들다고. 괜찮다 그러는데도 어제 나가더니 이거 사들고 와 며느리 모르게 가만히 주고 나갔소. 이런 건 얼마나 하는지 몰라. 내가 다리가 불편하다고 아까도 여기까지 자가용으로 데려다주고 갔소.”
팔찌가 해살에 반짝였다. 리씨가 힐끔 들여다보더니 화두를 받았다.
“당연하지. 그집 아들 같은 효자는 어디에도 없소. 지난번에는 안마의자를 사주지 않았소? 며느리 우리 말 모르는 게 좀 흠이지.”
김씨가 얼른 반박을 했다.
“그게 무슨 흠이요. 요즘엔 외국사람과도 결혼하는데 뭐. 우리 며느리 아들이랑 같이 외국회사에 있소. 저네 딸은 요즘 뭐하오? 지난해에 서른 넘었는데 결혼 안하오? ”
“걔는 일밖에 모르오. 우리 딸은 녀강자 스타일이라 결혼에 별로 관심이 없다오. 자기는 일과 결혼했다고 하는 게… 이번에 승진했소. 최년소 과장이라오. 지난번에 하루 쉬는데 회사가 어찌나 전화 와 찾는지. 프로젝트인지 뭔지 하는 게 끝나면 같이 어디 려행가자고 하는데 어디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리씨가 으흠 하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조용히 앉아있던 손씨가 지갑에서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통화버튼을 눌렀다.
“지난번에 산 탁구채가 어디 있냐구? 그게 그 옷장 두번째 서랍 안에 있지. 그거 찾아서 뭐 할라구요? 박령감이 같이 탁구 치자고 한다고? 알았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잘 놀다 오슈. 나는 언제 오냐고? 우리는 놀다가 해 떨어지면 가지. 알았수. 갈 때 소고기 좀 사 가지고 갈게. 저녁에 시원하게 무우 썰어서 국이나 끓여 먹읍시다.”
통화를 하고 나서 손씨는 셋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령감이 또 언제 들어오냐고 하네. 늙으막에 왜 이리 로친한테 집착하는지 모르겠소. 손주놈은 또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정이 많은지. 얼마 전에 고향에 가려고 했더니 너무 울어서 다시 눌러앉았소.”
시큰둥하게 내뱉는 손씨의 말에 몇해 전에 령감을 잃은 김씨와 리씨가 슬그머니 눈을 흘겼다. 이 재미에 매주 모이자고 하는 것 같았다. 각자 한주의 이슈거리들을 들고 나와서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마냥 같이 들여다보면서 흐뭇해하였다.
“아. 그리고 저번에 보내준 약 잘 먹었소. 다리 아프던 게 많이 좋아졌소.”
손씨의 인사에 다들 시선이 자연스레 한씨에게 모아졌다. 가장 말수가 적은 한씨는 고개를 들고 화사한 해살을 쳐다보다가 눈이 시린지 연신 끔뻑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다들 별거 아닌듯 하면서 건네는 자랑에 한씨는 늘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였다.
처음에는 그냥 사람이 숫기가 없어서 그렇거니 했다가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들 궁금증이 일었다. 몇번 물어서야 한씨에게는 딸이 하나 있고 지금 딸집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한씨는 화장기도 한점 없었고 옷차림도 수수했으며 머리가 태반이 희였는데 염색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둬서 남은 세 사람보다 두세살 어렸지만 훨씬 더 나이 들어보였다. 한씨는 물병을 열고 한모금 마신 뒤 두 손으로 병을 감싸쥐였다.
“나는 딸애가 하나 있어요.”
처음 듣는 얘기에 세 안로인은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한씨는 입술을 감빨고 물병을 매만지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편이 일찍 사고로 돌아가고. 집에 돈이 없어서 남들 다 가는 학원도 보내주지 못했는데 공부를 잘했어요. 알아서 장학금을 받으며 상해의 대학에 입학했지요.”
다들 부럽다는 눈길로 그런 얘기를 왜 이제야 하냐고 핀잔하였다. 잠간 망설이더니 한씨는 말을 이었다.
“졸업하고 나서 도처에 리력서를 보내더니 어느 날 좋은 회사에 들어갔대요. 일이 좀 많긴 한데 그만큼 신입에게는 후한 조건이였다고. 돈 벌어서 집 사면 같이 살자고 해서 왔어요.”
“어머. 그래서 집 샀소? 도시 집 값이 장난 아닌데. 딸이 야무지게 모았구먼. ”
“그래. 집이 있음 다 된 거지. 이제 결혼이야 뭐. 천천히 하겠지 뭐.”
“한씨 복이 터졌소. 그래도 딸이랑 사는 게 제일 좋아. 며느리는 어딘가 불편하오.”
“그게 말이 안 통해서 그렇다니까.”
“이 녀편네 정말 오늘 자꾸 우리 며느리 험담을…”
김씨와 리씨가 티각태각하는 사이 한씨는 침묵한 채 멀리 하늘 저켠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하도 검고 사려 깊어서 그가 보는 게 구경 하늘인지 구름인지 아니면 그 너머의 우주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한씨는 잠간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저 이번이 마지막으로 나와요. 다음주에 고향에 아주 돌아가려구요.”
다들 그동안 정 때문에 아쉬워 한씨의 손을 꼭 잡았다. 저녁이 다가오고 노을이 빨갛게 물들어갈 무렵, 한씨에게 무사히 귀향을 하라는 인사를 나누고 다음번 약속을 기약하며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씨는 길 맞은편에서 김씨 아들이 세 로인을 태우고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온 한씨는 키를 꽂아넣고 돌려 문을 열었다. 집은 먼지 한톨 없이 깨끗하였다. TV가 없어서 썰렁하긴 하지만 안온한 느낌의 벽지 때문에 그래도 누군가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 했다. 침실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는 벽에 걸린 사진을 마주한 채 옆에 있는 향에 불을 피워 향로에 꽂았다.
“올해도 다 지나간다. 김씨네는 아들이 금팔찌 사줬대. 리씨는 딸이 승진해서 기분이 좋아보였고. 손씨는 그 령감이 맨날 미워 죽을라 하면서도 살아있다는 게 유세고. 나는… 나는 말이다. 니가 그런 거 안 사줘도 좋고. 승진을 못해도 좋고 결혼을 안해도 다 괜찮으니까 제발 살아만 있어준다면 얼마나 좋겠니. ”
한씨가 힘에 부친지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사진 속에 말갛고 갸름한 녀자가 미소 지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은 집에 안 살아도 좋아. 그러게 왜 그렇게 자기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일을 했냐. 왜 이 늙은이가 너를 먼저 보내게 했어? 모든 게 다 있다 해도 니가 없다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니가 꿈꾸던 삶이라고 해서 엄마가 니가 살던 집에서 여태 살아왔는데 이제는 도저히 힘에 부쳐서 안될 것 같구나.
너 좋다던 그 자식은 다른 녀자를 만나서 이미 결혼해서 애가 둘이나 있고. 너네 회사는 사람이 죽었는데 금방 잊고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더구나. 너를 병원에 데려갔다는 그 로부부는 지금 잘살고 있는 듯 했어. 니가 간 지도 이미 8년이 지났어. 이제 엄마 고향가도 되지? 더 이상 이 집에 살 자신이 없어서 그런다. ”
사방은 고요하고 사진을 쳐다보는 한씨의 우묵한 눈에는 눈물이 깊게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딸애가 가장 선망했던 도시였고 오늘처럼 화사했던 어느 날 행장을 짊어지고 꼭 성공하겠다며 떠난 딸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했다. 이 도시에 다시 오게 된게 부고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딸의 장례를 치르고 한씨는 그가 동경했던 이 도시에서 대신 살아가면서 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유령마냥 딸의 숨결을 찾아 헤맸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선명해지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이제 떠나려고 한다. 끝이 어디까지일지 모르는 수행길이였다.
드디여 한씨는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였다.
어둠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한씨의 가냘픈 등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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