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매나네 이리 살갑게 대함둥?”
“에구, 아예 둘이 좋아합소!”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지고 앉아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지꿎은 롱담이 오고간다.
…
극본: <로동 경색 좋구 좋네> (1974년)
창작인: 김정선, 리영근, 원주삼
배우: 김윤준, 김수룡, 김정선
고라니도 서식한다는 고즈넉한 시골마을, 수많은 별들이 서리가 되여 초가집 지붕 우에 살포시 내려앉고 헛간 시렁 우의 울음닭은 어김없이 일찍 잠을 청한다는 시골, 해 뜨자 해 넘어간다는 겨울날의 시골마을이라지만 이날 만큼은 그냥 시골마을이 아니다. 한적하던 시골에 때아닌 왁자지껄, 분주함으로 들썩인다.
소나무를 태웠나? 송진이 타는 냄새가 푹 끓인 구수한 시라지장국 냄새와 어우러져 코를 간지럽히는 집안에서 이 마을은 물론 이웃마을에 사는 남녀로소 할 것 없이 한구들 빼곡이 앉아 한창 온돌공연의 하이라이트인 ‘삼로인’ 소품을 구경하고 있다. 미처 구들을 차지하지 못한 이들은 복도, 창문턱이나 가을걷이로 거둬들인 콩자루 우에까지 걸터앉았다.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목 구들장이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푹 꺼져들어간다. 한바탕 소동에도 집주인 아저씨는 소품구경에 정신이 팔려 아예 무관심이다.
창문 밖도 례외가 아니다. 쨍하니 얼어붙었던 문풍지는 이미 북북 찢어진 채 펄럭인지 오래이다. 창문 밖에도 오구작작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겨울 동장군 추위에도 꼭 소품구경을 즐기겠다는 마음들이다.
그날 하루 이 마을에서만 벌써 다섯번째 공연이다.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지 마을 어르신들의 재청이 끊기질 않는다.
…
극본: <또 틀렸군>
창작인: 최중철
배우: 홍미옥, 허상권, 최중철
어제날 우리 지역 겨울의 농촌에서 펼쳐졌던 진풍경이다.
우리 지역의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구수하게 이야기를 꾸며왔던 ‘삼로인’은 2008년에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적 종목 명부에 올랐다.
‘삼로인’은 중국조선족 연극발전사에서 창작일군과 배우들이 자주적으로 창조한 하나의 독특한 연극쟝르이다.
“지난 수십년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날들을 시골마을에서 보냈습니다. 삼로인은 저에게 날개를 달아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지금도 현역을 뛰고 있는 ‘삼로인’ 성급 전승인인 ‘쌍가매’ 홍미옥이 전하는 말에는 여전히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있다.
연변가무단에서 편찬한 《연변가무단지》에 따르면 삼로인의 시초는 ‘1로인’으로 극작가이자 배우인 홍성도가 창안하였다. 그 배경을 보면 당시 농촌에서 막 토지개혁이 끝나고 머슴살이를 하던 많은 이들이 땅을 분배받고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고 전국에서 문맹퇴치운동이 전개되면서 농민을 조직하여 야학에 다니면서 문화지식을 쌓게 하였는데 여전히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있던 많은 사람들이 녀자들이 사회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 농촌에서 호조조를 조직하는데도 자신에게 불리익이 돌아올가 우려하면서 가입을 꺼려했다. 이러한 때에 화룡 평강벌의 한 마을에 내려가게 된 홍성도는 현지 로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상황을 알게 되였고 이를 소재로 ‘1인극’ 즉 ‘1로인’을 창안했다.
“그때 홍상도 선생이 집요하게도 농촌생활을 파고들었습니다. 덕분에 지금의 삼로인이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삼로인’ 성급 전승인인 ‘조롱박’ 최중철이 하는 말이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파고든다면 이렇다.
어느 날, 홍성도는 각별하게 지내던 마을의 한 로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으면서 마을 로인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자고 부탁을 한다. 로인은 인차 마을 로인들을 집으로 불러들였고 집주인의 두루마기를 빌려입고 가짜수염을 단 홍성도가 이들의 대화에 끼여든다. 마을 사람들은 분장을 한 홍성도를 그저 마실 온 이웃마을 로인인 줄로만 알았다.
홍성도는 점잖게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아 잡담을 하는 로인들 속에 끼여들었는데 일부러 화제를 돌려 자신의 마을에서는 야학을 어떻게 운영하고 또 호조조를 꾸려놓고 어떻게 서로 도와주고 있는가를 구수하게 들려주다가 슬쩍 “이 마을의 상황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로인들이 너도나도 야학과 호조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이윽해서 홍상도는 그들이 리해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과 편견들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하고 해석해주었다.
당시 농촌에는 아직 등잔불을 쓸 때였으니 사람들은 홍상도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가 하는 말에 “맞는 말이요”, “옳소”라고 하면서 련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나중에 홍상도는 일이 있다는 핑게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가 분장을 지운 후 슬쩍 다시 그들의 자리에 끼여들었는데 모두들 방금 온 이웃마을 로인의 말이 정말로 리치에 맞다며 긍정을 하더라는 것이였다.
하숙집 온돌에서의 ‘1로인’ 연기가 이렇게 성공하자 홍성도는 정식으로 ‘1로인’ 공연을 로투구, 도원, 천보산, 동불사, 세린하 등 곳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홍성도는 극의 방식을 조금 더 풍부히 하기 위해 로인 한 사람을 무대에 더 올렸는데 특징은 두 로인중 한쪽은 주로 자신의 관점과 의지를 표명하고 다른 한쪽은 림기응변으로 주제를 끌고 나가는 것이였다. 그게 바로 ‘2인극’ 즉 ‘2로인’이였다. 첫번째 ‘2로인’ 극은 홍성도가 아버지를 맡고 리량옥이 딸 역을 맡은 <중간아이>이였다.
그리고 1950년에 지금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삼로인’이 드디여 등장하게 된다. 그 시작은 이해 1월로 거슬러올라간다.
극본: <우연한 상봉>
창작인: 최중철
배우: 홍미옥, 허상권, 최중철
그때 연변문공단에서는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선전부 부장 최채의 인솔하에 화룡현 명암, 룡포, 룡수평, 신민, 룡호, 석국 등지의 시골마을로 내려가 생활체험을 하면서 농촌구락부를 세우고 소분대 공연을 조직하였다.
연변문공단의 소분대가 룡수평에서 공연을 가지게 되였을 때 홍성도는 ‘2로인’ 극이 원하는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하기에는 력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허창석, 원주삼, 최수봉, 문일평 등 배우들과 합의를 본 후 ‘3인극’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호조합작에서 해결해야 할 주요문제를 극의 주제로 삼고 홍성도가 룡호에 가 전형적인 인물과 사례를 알아본 후 원주삼, 최수봉, 허창석에게 세 인물의 각기 다른 성격과 언어에 따라 각자의 연기를 구상하게 하고 극본 없이 초보적으로 합을 맞춘 뒤 1월 22일에 신민촌에서 열린 ‘동락야회’에서 즉흥적으로 말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무대를 채워나갔다. 이들이 무대에서 마을의 일들을 손금 보듯 훤히 꿰뚫고 연기하는 모습에 촌민들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고 이윽고 관객석에서 마을 로인 한명이 무작정 무대로 뛰여 올라가더니 세 배우 속에 끼여들어 시비에 참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허창석, 원주삼, 최수봉은 ‘불청객’인 마을 로인에 어지간히 놀랐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극 속에 받아들여 말을 주고받으면서 호조조로 인해 생긴 갈등을 림기응변을 통해 로인을 설득시키면서 무대를 원만히 마쳤다. 이들이 구수하게 풀어가는 연기에 관객들은 그만 배를 그러안고 폭소를 터뜨렸다.
이튿날 세 로인의 재미있는 연극은 린근 마을에까지 퍼져나갔고 서로 이들을 마을 연극무대로 모셔가려는 경쟁이 붙기도 했다.
이렇게 ‘삼로인’은 농민들 속에 스며들면서 공연팀이 마을을 찾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은 “세 로인이 왔느냐?”, “오늘 소품 내용은 뭐냐?”부터 물었고 공연이 있는 날이면 마을 분위기는 설 쇠는 분위기 만큼이나 흥성거렸다.
“삼로인 초창기에는 극본이 없이 즉흥적으로 연기하다 보니 가끔 무대가 어수선할 때도 있었습니다. 배우들의 림기응변으로 이어가다 보니 때론 배우들끼리도 미처 흐름을 잡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최중철이 하는 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0년대말부터는 극본을 정식으로 작성해 리허설까지 하게 되였다. 그리고 무대를 온돌, 밭머리, 탈곡장에서부터 점차 도시에까지 넓히면서 1950년 6월에 연길시쓰딸린극장(인민영화관) 첫 공연의 막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최중철은 “첫 공연에서 노래, 춤, 단막극 등 다양한 종목이 무대에 올랐지만 두고두고 관광객들 속에서 널리 회자된 건 역시 삼로인이였습니다. 가끔 년세 든 로인을 만나면 그때 무대에 올랐던 삼로인 연극 이야기를 전해듣기도 합니다.”라고 전했다.
1964년에 연변군중과외문예대표단에서 삼로인 《풍수가》로 전국군중과외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해 호평을 받았고 그 뒤로 인차 연변의 각 현, 시 예술단체와 과외예술단체에 빠르게 보급되였고 동네방네 소문난 삼로인은 흑룡강성, 료녕성 등 조선족집거지역에도 알려지면서 공연초청을 받기도 했다.
“공연을 다니면서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홍미옥이 풀어놓는 이야기에는 많은 추억들이 들어있다.
한번은 공사마을에서도 마을뻐스로 세시간을 달리고 또 소수레에 앉아 울퉁불퉁한 흙길을 한시간 넘게 더 가야만 먼발치에서 굴뚝이 보인다는 흑룡강성의 어느 외딴 조선족산골마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온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모아봤자 고작 9명, 공연팀보다 관중이 더 적었던 무대였기에 특별히 기억이 남는단다.
극본:<로인축구대>(1989년)
창작인: 김흥빈
배우: 최중철,허상권, 서광일
그리고 또 시골마을로 공연을 떠나면 무대라야 고작 촌민집 온돌이나 외양간, 건조실이 전부였기에 구경군들이 주인집 돼지물독에 빠지는 일, 갑자기 마을 전체가 정전이 되여서 초불을 켜놓고 공연을 시작했는데 절반쯤 공연했을 때 전기가 와 촌민들이 “환한 불빛에서 다시 보자.”고 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이처럼 큰 사랑을 받아온 삼로인은 창시자들인 홍성도, 원주삼, 허창석, 최수봉의 뒤를 이어 70, 80년대에는 리영근, 남수일, 백종철, 량균, 김상옥, 구순자 등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삼로인 배우로 되였고 90년대 후로부터는 허상권, 최중철, 홍미옥 등이 삼로인의 맥을 이어갔다.
1979년 3월에 연변구연단이 설립되면서 삼로인은 공연무대에서 빠뜨리지 않는 종목으로 되였고 통계에 따르면 삼로인은 1950년에 세상에 나와서부터 1966년전까지 15년간에 3000여차례의 공연이 있었고 1957년 3월에 화룡현예술단이 세워지면서 1989년까지 공연된 삼로인 종목이 1700여차에 달한다.
현재 삼로인의 주요 보존단위는 화룡시문화관이고 대표적인 기능 보유자는 성급 전승인으로 있는 최중철과 홍미옥, 주급 전승인으로 있는 허상권이다.
솔직히 우리의 많은 무형문화유산이 그러하듯 삼로인도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는 신인배우 영입이 시원찮은 형편이다. 물론 전승인들이 경력을 통해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삼로인 보급과 교육에 참여해서 젊은 세대에게 ‘삼로인’의 가치를 전달하는 데 앞장을 서고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1987년부터 극소품이 흥기하면서 차츰 극소품과 삼로인 형식이 융합되는 형태가 나타났고 원 삼로인 형식의 작품은 보기 드물게 되였습니다. 거기에 뉴미디어와 인터넷기술은 또 사람들에게 더욱 넓은 정보선택과 예술교류의 공간이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화룡시문화관 최영희 관장은 이런 정황에 비춰 현재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삼로인작품을 내놓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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