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다채로운 수채화 같은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 1970년대초, 나는 수전농사를 짓는 넓은 벌에서 태여났다. 내가 태여난 마을은 30여호 남짓한 인가가 살고 있는 조선족마을로, 인심이 후하다고 소문난 동네였다.
나의 기억 속에 40평방 좌우 되는 우리 초가집은 마을의 제일 북쪽에 있었다. 우리 집 뒤에는 넓이가 반메터 되나 마나 한 작은 개울물 하나가 졸졸 흐르고 있었고 그 북쪽은 넓은 논밭이 가슴이 확 트이게 펼쳐져있었다. 나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개울물에서 놀기 좋아했다. 눈만 뜨면 개울가로 가자고 성화를 부리는 나 때문에 부모님들은 한시도 시름 놓을 수 없었다. 엄마는 점심에 낮잠을 자려 해도 내가 걱정되여 끈으로 나의 허리를 동여매고 쉬였다고 한다. 내가 점차 커가며 개울물은 나의 제일 좋은 놀이터가 되였다.
개울가에는 미나리가 씨를 뿌린 것처럼 탐스럽게 자랐다. 터전의 채소보다 먼저 자라난 미나리는 우리 집 식구들의 제일 좋은 봄철 반찬거리였다. 엄마는 미나리를 캐서는 기름에 볶기도 하고 데워서 무쳐 반찬을 하기도 하였다. 엄마가 미나리를 캘 때면 나는 집의 작은 광주리를 들고 개울물에서 물고기를 잡군 하였다. 광주리를 물에 대고 한참 있다가 쳐들면 쏴하고 물이 빠지고 작은 미꾸라지 몇마리가 광주리에서 꼬불딱꼬불딱거린다. 그때면 나는 와! 하고 환성을 질렀고 엄마는 행복에 겨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며 “또 눈먼 물고기가 잡혔구나!” 하며 놀려주었다. 나는 광주리에 걸려든 미꾸라지를 다시 개울물에 놓아주었다. 엄마가 잡은 미꾸라지를 놓아주어야 다음번에도 물고기가 나를 찾아온다고 가르쳤기 때문이였다.
장마철 비가 오는 날이면 개울물은 거의 두배로 불어났는데 그때면 아버지는 개울물을 막고 밤이면 네면을 나무로 막은 채를 놓았다. 아침에 깨여나보면 커다란 소래에 크고 작은 미꾸라지들이 꽉 차 바글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미꾸라지들을 큰 것과 작은 것을 갈라서 소금을 쳐놓았다. 미꾸라지는 소금을 치면 밸 속의 어지러운 것을 다 토해낸다는 것이였다. 엄마는 큰 미꾸라지에다 감자며 가지를 넣고 된장을 살짝 풀어서 국을 끓였다. 엄마가 끓인 국은 언제 먹어도 군이 뚝 떨어지게 시원하였다.
엄마는 작은 미꾸라지는 말리워서 겨울의 반찬거리로 준비했다. 겨울이면 김치움에 보관한 감자, 무우, 배추김치로 온 겨울을 보내야 했던 그 시절 말리운 미꾸라지로 만든 반찬은 우리 집 식구의 주요한 영양보충제였다. 엄마는 작은 미꾸라지를 사탕가루를 살짝 치고 바삭바삭하게 구워 내가 간식으로도 먹게 맛있게 만들기도 하였다. 어린시절 일년 동안 기름진 고기구경 몇번 못했지만 미꾸라지를 많이 먹은 덕분으로 건실하게 자랐고 지금까지 병원신세 한번 지지 않고 든든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면 나와 키돋움하며 자란 개울가의 미나리들이 새하얀 꽃을 피운다. 자잘한 꽃들이 한조 한조 조를 묶고 다시 모여 탐스러운 꽃송이로 피여난 미나리꽃은 어쩌면 한가족 한가족이 오붓하게 모여 한개 집체를 이룬 우리 동네를 상징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 마을사람들은 미나리꽃을 종래로 꺾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잘 자라 우리들의 맛갈스런 반찬거리로 되여주길 바라는 마음이였을 것이다. 마을사람들도 어쩌면 미나리꽃이 우리 마을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멀리서부터 하얀 미나리꽃이 하늘하늘 춤추며 나를 반겨주었다. 아버지는 늘 작은 개울물이 우리 집 식구를 양육시켜주고 우리 딸들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준 보금자리라고 하면서 개울물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마을의 많은 집들에서 자기 집 뒤에 석탄재며 생활쓰레기를 버리군 하였는데 아버지는 개울물이 어지러워질가 봐 생활쓰레기를 모아놓는 법이 없이 바로 소각하고 석탄재는 땅에 묻었다. 아버지의 개울물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가족을 향한 사랑이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개울물을 깨끗이 지켜주었기에 내가 개울물에서 마음껏 놀 수 있었던 것이다.
텔레비죤도 없던 그 시기 별다른 문화생활이 없다 보니 밤이면 마을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앉아 이야기판을 벌리군 하였다. 하늘에서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온 마을이 떠나갈 듯 합창했다. 우리 집 뒤의 논밭에는 몸 옆에 일곱개의 아가미구멍이 있는 칠성어가 특별히 많았는데 남정들은 밤이면 칠성어를 막대기에 꿰여 모닥불에 구워 먹었다. 불에 구워 익힌 칠성어는 맛이 고소하고 입에서 감칠맛이 났다. 드문드문 먹어 그런지 고기도 많고 기름기도 많은 칠성어가 미꾸라지보다 더 맛있었다. 내가 아버지보고 “아버지는 어째서 칠성어를 잡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본 적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미꾸라지를 많이 잡을 수 있는 건 우리 마을사람들이 우리가 미꾸라지를 잡는 걸 알고 양보하였기 때문이란다. 누군가 우에서 채를 놓는다면 우리가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겠니? 우리한테는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다른 집에서 잡는 칠성어까지 잡아서야 되겠니? 너무 자기 욕심을 채우지 말고 다른 사람도 배려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시였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왜 농사일 하면서 짬짬이 시간 내여 알뜰히 말리운 미꾸라지를 어느 집에 생일잔치를 하거나 몸이 편찮은 분이 있다면 제일 좋은 걸로 골라 그 집에 가져가는지 알았다. 마을사람들의 따뜻한 배려에 대한 엄마의 보답이였으리라! 값진 것이 아니더라도 서로 나눠 먹으며 오고 가는 따뜻한 정이 있었기에 일년사시절 힘들게 농사 지어도 년말이면 수입이 없이 빈손으로 나 앉을 때도 있었지만 힘겨운 나날을 함께 이겨나갈 수 있었던 것이였다.
오락거리가 별로 없던 그 시절에 마을사람들에게 쾌락과 웃음을 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천영화였다. 며칠에 한번씩 상영하였던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마을과 멀리 떨어진 중심마을에 있는 소학교 운동장에서 로천영화를 상영하는 날이면 온 마을이 경사난 듯하였다. 엄마는 저녁밥상을 일찍 치우고 간식거리를 준비하였다. 간식거리라야 가마치며 철에 따른 과일, 강냉이구이, 감자구이 이런 것이였다. 영화를 상영하는 날이면 각 소대에서 다 모이다 보니 일찍 가서 자리를 정해야 한다.
어느 한번은 로천영화를 돌리는 날인데 여섯살밖에 안되는 내가 초저녁잠을 자게 되였다. 엄마는 한돌이 금방 지난 어린 녀동생을 업고 먼저 가서 자리를 정하려고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로 떠나가면서 아버지보고 나를 좀 더 재우다가 꼭 깨워가지고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무심한 아빠는 엄마의 말을 귀등으로 흘러넘기고 혼곤히 자는 어린 나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영화구경 하러 갔다.
자다가 잠에서 깨난 나는 어두컴컴한 집에서 엄마 아빠를 찾아 구슬프게 울었다. 내가 아무리 슬프게 울어도 개미 한마리 찾아볼 수 없는 마을에서 나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그때 누군가 외지에 갔다 마을로 돌아오게 되였다. 불빛 한점 없이 캄캄한 마을에 멀리서 승냥이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간간히 들리더란다. 그 사람은 남자임에도 그 울음소리에 등골이 오싹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종래로 승냥이가 출몰한 적 없는데 하고 용기를 내여 그 울음소리를 찾았더니 제일 북쪽에 있는 우리 집에서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였단다.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영화 상영하는 곳에 가 엄마를 찾아서야 엄마는 아버지가 나를 집에 두고 혼자 영화 보러 온 것을 알게 되였다. 그때 서른살도 안되였던 엄마 아빠에게 그 로천영화의 유혹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농촌마을에서 곡식들과 벼이삭이 무르익고 들꽃이 피고 지는 자연에 익숙했던 어린 나에게 로천영화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했고 미래의 꿈을 심어주었다. 그때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 로천영화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알게 된 것이다. 그 시절에는 제목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영화를 통해 일망무제한 바다를 처음 알았고 바다 속에 내가 늘 보았던 검고 꼬불꼬불한 미꾸라지나 칠성고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색갈의 무늬를 가진 물고기들이 많고 많다는 것을 알았다. 후에 그 영화의 이름을 찾아보니 《풍운도(风云岛)》라고 하는 영화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항공 촬영까지 동원하여 바다경치를 찍은 영화라고 한다. 바다의 세계는 어린 나를 호기심과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게 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바다를 좋아했나 보다.
영화에서 바다를 본 이후로 나는 늘 아빠보고 바다 보러 가자고 졸랐다. 막무가내로 떼질 쓰는 나에게 아버지는 “작은 개울물이 모여서 큰 강물이 되고 강물이 흘러 흘러서 넓은 바다로 간단다. 지금은 네가 너무 어려서 바다로 갈 수 없으니 이제 크면 바다 물고기들을 찾아가겠다고 편지를 써 개울물에 떠보내는 것이 어떻냐?”라고 하였다. 나는 아버지 도움으로 바다 물고기에게 편지를 써서 작은 유리병에 넣어 개울물에 띄워보냈다. 개울물과 바다, 개울물에는 바다 꿈을 꾸는 어린 소녀가 있었고 바다에는 소녀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물고기가 있었다. 개울물은 소녀의 아름다운 소원을 싣고 둥둥 떠나갔다. 지금처럼 마음대로 세상 구경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바다구경 한번도 못한 아버지는 또 얼마나 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을가? 그 시절 나의 꿈은 어서 빨리 커서 부모님들과 함께 바다로 가 예쁜 물고기와 만나는 것이였다.
내가 아홉살 나던 해 봄, 엄마가 외할머니를 대신하여 향병원에 출근하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 집과 십여리 떨어진 향소재지로 이사를 가게 되였다. 이사한 새집은 단위 주택으로 앞뒤가 다 벽돌집으로 막혀있었다. 초가집에서 살면서 늘 부러워했던 고래등 같은 벽돌집으로 이사했지만 새집에는 나를 동반해주던 개울물이 없었고 나와 함께 놀던 짜개바지 친구들이 없었으며 인심 후한 마을사람들이 없었다. 새집에 정을 붙이지 못한 나는 늘 고향쪽을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어있었다. 그립다는 단어의 의미도 모르는 나에게 그리움이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가슴으로 가르쳐준 곳이 바로 고향이였다. 내가 늘 놀았던 개울물이 그리웠고 친구들이 그리웠고 거기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에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새집으로 이사한 그해 여름방학의 어느 날 오후, 나는 네살 난 동생을 데리고 고향을 찾아 떠났다. 어린 동생이 걷다가 힘들다고 칭얼거리면 업고 가고 업고 가다 힘들면 동생을 달래서 걷게 하면서 쨍쨍 내리비치는 따가운 해볕을 쬐이며 태여나 처음으로 먼길을 가게 되였다. 새집 옆의 큰길로 계속 북쪽으로 올라가면 내가 살던 고향마을에 도착할 수 있는데 몇살 되는 어린아이에게는 그 길이 너무나 힘들고 먼길이였다. 오후에 떠난 나와 동생은 해가 저무는데 고향의 변두리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길 가던 한 아저씨가 두 어린아이가 날이 저물어가는데 힘겹게 걸어가는 것이 이상하여 나를 붙들고 “너희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거냐?”고 물어보는 것이였다. 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내가 살던 마을의 이름을 대면서 거기로 가고 싶다고 하니 그 아저씨는 “너희들이 혹시 뉘집 딸이 아니니?” 하며 우리 엄마 아빠 이름을 대는 것이였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 아저씨는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너희 부모님들은 너희가 잃어졌다고 얼마나 찾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지만 네가 얼마나 네가 살던 곳을 잊지 못했으면 이렇게 어린 동생을 데리고 먼길을 떠났겠냐? 일단 나하고 같이 너의 고향마을로 가 네가 아는 사람을 찾아보자꾸나!” 하시였다. 그 아저씨가 동생을 업고 우리는 계속 길을 재촉했다. 그 시기는 자전거도 온 마을에 몇대 없을 때였다.
내가 살던 마을로 가려면 소학교를 지나야 하는데 마침 그날은 로천영화를 상영하는 날이여서 우리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운동장에 모여있었다. 그 아저씨가 “이 아이들을 알아보는 사람 있소?” 하고 소리치자 우리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와 나와 동생을 에워쌌다. “너희들이 어떻게 왔니? 우리가 보고 싶어서 왔겠구나!” 마을사람들은 동생을 안아준다 나의 손에 먹을거리를 쥐여준다 하며 반가워서 야단이였다. 아, 고향이란 바로 이런 곳이였구나! 여기에는 언제나 나를 품어주는 풍요로운 자연이 있고 인심 좋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였다. 내가 정녕 무엇을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우리 가족이 이사하고 십여년이 지난 후 우리가 살던 마을의 사람들은 다 큰 마을로 이사를 했고 마을은 수전으로 변했다. 우리가 살던 집터도 개울물도 자취를 감추었다. 나의 동년의 꿈과 추억이 묻어있는 고향은 나에게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깨우쳐주었고 사람지간의 따뜻한 정은 그 어떤 어려움도 곤난도 이겨나갈 수 있다는 법을 깨우쳐주었다.
여름이면 개울가에 물장난 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넘쳐나고 가을이면 새하얀 미나리꽃이 황금벼물결을 동반하는 고향은 영원히 내 마음속의 제일 큰 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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