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어쩌다 외출한 사장이 그림 한점을 사왔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슈리글리가 그린 레몬 그림이였다.
가게에 들어선 사장님은 조심스레 포장지를 뜯더니 그림을 남쪽 벽에 걸어놓는다. 레몬 그림 한점을 걸어놓았을 뿐인데 그림색채가 주황색이여서 그런지 가게가 대뜸 환해졌고 상큼한 기분이 감돌았다. 팔짱을 끼고 그림을 흔상하고 있는 예쁜 사장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어리고 약간은 희열에 들떠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선보러 가는 열여덟살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 같았다.
이어 사장이 입을 열었다.
“언니, 이 그림이 너무 예쁘지 않아요?”
“글쎄요…”
나는 말끝을 흐리며 두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아무리 보아야 무심하게 그려진 듯한 선과 단순한 형태로 그려진 주황색 둥그런 타원형의 레몬이고 크기에 비해 앙증맞은 초록색 꼭지가 웃쪽에 달려있는 평범한 그림이였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며 그림을 보고 있는데 이어 사장이 말을 이었다.
“언니 이 그림이 한화로 몇십억이래요. 믿어지지 않죠? 내가 산 그림은 모조품인데 50만원에 샀어요. 나는 그림 볼 줄을 잘 모르지만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내 힘든 마음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아서 무작정 샀어요.”
나는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웬 그림이 이렇게 비싸담. 보기에는 너무 평범한 그림 같은데 그림가격이 억대라니…
“그림이 비싸네요. 그런데 음미하면서 자세히 보고 있으니 이 그림이 자석처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많은 사색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 같아요.”
내 말에 동감이 되는지 사장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대칭되게 그림 아래우에 파란색 영문으로 씌여진 글을 읽어주는 것이였다.
“‘인생이 당신에게 레몬을 선물하였다면 당신은 반드시 그 레몬을 먹어야 한다.’ 이는 화가가 직접 쓴 글귀래요. 자신이 그린 그림마다에 짤막한 메시지를 써놓는 것이 이 화가의 개성이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너무도 평범한 말인데 말 한마디가 이렇듯 내 가슴벽을 세차게 치다니? 나는 속으로 그 말을 다시 곱씹었다.
그림을 보면서 사장님과 한참을 수다를 떨고 주방에 들어왔지만 내 마음은 그때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계속 화가의 글귀가 내 귀전을 뱅뱅 맴돌았다. 부지중 세찬 쓰나미가 밀려오듯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몰려오면서 명치끝이 저려오고 마음이 울컥해졌다. 이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퇴직을 하고 이순의 나이에 어쩔 수 없이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내 상황이 외롭고 서글퍼서일가 아니면 아직도 현재진행중인 레몬처럼 시고 떫은 내 한국생활 때문일가?…
삶에 쫓기워 어쩔 수 없이 이순의 나이에 한국땅을 밟고 불고기집에서 일한 지도 어언 몇달이 지났다. 식당일은 무척 힘들었다. 그래도 참고 견디여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쨍하고 해뜰 날이 오겠지 하는 일루의 희망을 안고 아침에 눈을 뜨면 가게에 나가 꾸역꾸역 일을 했다. 돈을 벌어야 했으니…
돈에 생각이 미치자 이 몇년간 돈 때문에 수없이 울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돈이 무엇인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가? 돈이란 한낱 특제한 종이쪼각에 불과한데 그 종이쪼각이 사람을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한다. 그 종이쪼각 때문에 내 삶은 엉망이 되였고 온통 레몬맛으로 절여져 한때는 삶의 의욕까지 상실하였다. 삶의 낭떠러지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내 손을 잡아준 건 엄마 같은 언니였고 친구들이였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내 앞에 닥친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었을가? 덕분에 아들이 두번의 사업실패로 진 빚 200만을 거의 다 청산하고 남은 빚을 마저 갚으려고 출국의 길에 올랐는데 인류문명의 표지이기도 한 그 돈을 벌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가난은 수치이고 부유함은 능력이다. 그래서 달마다 들어오는 월급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모든 설음과 어려움을 꾹꾹 집어삼키며 세척기가 되여 똑같은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나다.
그러던 어느 날이였다. 가게에 네 식구가 들어섰다. 아들과 딸은 무척 귀엽게 생겼는데 초등학생 같아 보였다. 불판을 사이 두고 단란하게 마주앉은 네 식구의 얼굴에는 행복이 물결치고 있었다. 음식을 주문받고 이어 음식을 상에 차려주고 돌아서려는데 녀자아이의 목소리가 내 잔등을 따갑게 때렸다.
“엄마. 저 이모 년세가 꽤 많아보이는데 힘든 식당일을 어떻게 하지요? 불쌍해.”
“그러게 우리 딸 앞으로 편안하게 살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요. 안 그러면 앞으로 허드레일을 해야 해요.”
모녀의 대화를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성장하는 딸애에게 공부를 안하면 나처럼 식당일밖에 할 수 없다는 리념을 심어주느라 한 말 같지만 어쩐지 나를 두고 한 말 같아 마음이 시려왔다. 나이 이순을 넘기고 서러운 타향살이에 가뜩이나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져서 견딜 수 없는데 본의 아니게 귀에 거슬리는 대화를 듣고 나니 기분이 엉망이였다. 이어 시고 떫은 레몬맛이 내 입안을 꽉 채웠다.
‘이거 왜 이래. 사람을 보기를 어떻게 보고. 이래 보여도 한때는 중국에서 번듯한 교원직업에 종사하였다구.’
잔뜩 자존심이 상해 혼자 씩씩거리고 있는데 3호 식탁에서 손님의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사장님, 여기 쌈장하고 마늘과 상추를 더 주세요.”
홀에서 일할 땐 사장님소리를 많이 듣는다. 손님이 요구하는 밑반찬을 더 갖다주고 나서 나는 애써 언짢은 내 마음을 달랬다. 옛날에 어떤 직업에 종사하였든 어떤 성스러운 일을 하였든간에 지금 이 상황은 내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여의치 않는 운명 앞에서 지금의 힘든 상황을 개변하려면 나한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꾹 참고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지 않을가? 그것만이 내가 살아갈 길이 아닐가?
다시한번 가게 남쪽 벽에 걸린 레몬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말을 되뇌였다. 그래 인생이 어찌 내내 달콤하기만 하랴. 기나긴 인생의 길을 걸어가느라면 신맛, 쓴맛, 단맛을 맛보는 가운데서 인생은 더 단단해지고 더 감칠맛이 나는 것이 아닐가? 생존경쟁이 치렬한 사회에서 기나긴 인생을 살다 보면 꿈은 늘 깨지기 마련이고 현실은 사방이 벽이다. 그 벽 속에 갇혀서도 눈을 감으면 어딘가에 꽃길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이슬 되여 번져나온다. 그 기억들이 메마른 가슴을 다독여주어 살 만한 인생이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느라면 삶에 어찌 해뜨는 날만 있으랴. 뼈 시린 밤도 지나가고 한낮이 어느덧 저물어 밤이 오듯이 삶도 기쁨과 슬픔, 단맛과 신맛이 그렇게 돋았다가 저물고 꽃처럼 생글 피였다가 시든다. 하기에 인생이 당신에게 레몬을 선물하였다 하여 주어진 삶을 원망하지 말고 기꺼이 그 선물을 껴안고 모든 것을 이겨낸다면 언젠가는 달콤함이 인생에 녹아내려 삶을 풍요롭게 적셔주리라.
그래 이제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오직 앞만 보고 달리자. 그러면 내 인생의 레몬은 나에게 가장 달콤한 맛을 선물해줄 것이고 래일의 푸른 희망은 두팔 벌려 나를 뜨겁게 뜨겁게 포옹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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