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허명훈

2024-10-11 08:52:54

산과 들, 길가의 가로수들이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아름답고 황홀하기가 그지없다. 하나의 잎이 저렇게 붉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단했을가 생각하니 마음이 저리다. 단풍을 가까이 보고 싶어 가로수 곁으로 다가갔다. 단풍나무의 불타는 듯한 선명한 붉은색에 취해있는데 이따금씩 차거운 바람이 불어 단풍잎들이 발 아래 즐비하게 떨어져 밟힌다.

잎은 봄을 맞아 새순을 틔우고 여름에는 한껏 록색으로 푸르렀다가 가을에 황홀한 단풍이 된 후 락엽으로 생을 마감한다. 잎의 생애에 그려진 갖가지 그림들이 새겨진 단풍잎을 주어들고 유심히 바라본다.

새봄에 여린 새순을 할퀴고 가는 꽃샘추위를 견뎌낸 인내를 잎맥에서 찾아본다. 여름에 강렬한 뙤약볕에 더 푸르던 정열을 잎의 색갈에서 읽어낸다. 가을에는 피빛으로 황홀하게 물들어가는 색갈에서 화려함의 진수를 본다. 오늘은 락엽으로 생을 마감하면서도 거름으로 되고저 뿌리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의 순리를 느낀다. 떨어지는 락옆을 보면서 나는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이 떨어지는 락엽과 같다는 생각에 젖는다. 락엽은 새싹들이 푸른 몸을 세우는 데 필요한 거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듯 나는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희생하는 삶에 락엽처럼 후회가 없다.

우로는 80세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중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봐드려야 했고, 안해에게 행복을 찾아주고 딸에게 꿈을 펼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나의 몫이고 업이다. 그래서 늘 바쁘다. 아들, 남편, 아버지의 역할을 잘해내기 위해 나는 나의 꿈이 바뀌였고 나의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나의 잠을 쪼각냈다. 나의 효성과 피와 땀으로 빚은 생활비가 없었다면 가정의 생계와 생활 유지가 어려웠고 딸의 꿈은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농촌에서 호도거리 책임제를 실시하면서 우리 네 식구에 차례진 책임전은 1.2헥타르밖에 안되였다. 가정의 생계 유지가 어려웠다. 그래서 해마다 이웃 농장의 논을 5~8헥타르를 도급 맡아 부쳐 그나마 가정의 생계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더 잘살아보려는 욕심에 복장장사에 나섰는데 1년 만에 4만원의 빚을 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비관하거나 절망에 빠져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풀풀 쉬고 있을 한치의 여유와 기회도, 권리도, 용납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서의 무한한 책임과 무게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삶의 희망과 끈을 놓지 않고 백방으로 재기의 기회를 마침내 노려야 했다. 1996년 봄, 나는 가을에 돈을 3푼씩 더 주기로 하고 8만원의 리자돈을 맡았다. 년로한 어머님과 갓 태여난 딸애를 안해에게 맡기고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돈 벌러 떠났다. 나는 산 설고 물 선 타향에서 위험이 사처에 도사리고 있는 렬악한 환경과 로동 강도가 세기로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최하층 공사판에서 하루가 삼추같이 매일 뼈를 깎이고 기름을 짜이면서 일했고,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돈을 벌었다. 그렇게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버는 족족 집으로 보내 빚을 갚았고 돈을 모았다. 그러다 2005년 10년 만에 귀향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몇번의 10년이 있을가? 하지만 나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내 인생의 10년을 공사판에다 버렸다. 돌아온 후 나는 25만원을 들여 120평방짜리 2층 벽돌집을 짓고 도시 아빠트도 울고 갈 정도로 실내를 고급스레 장식해서 “애비야, 우리도 언제면 널직한 벽돌집에서 살아보냐.” 하고 늘 벽돌집을 부러워하던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렸다. 우리 네 식구는 10년 동안의 리산 가족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단란하게 모여 행복하고 유족한 나날을 보냈다.

그 후 어머니는 벽돌집에서 6년을 더 사시다가 86세로 세상을 떠났고 딸은 성장해서 곧 대학입시를 앞두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날 10년 동안 접었던 꿈을 펼쳐보려고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딸애가 들어와서 대학시험을 쳐봤자 자기 성적으로는 중점대학은 못 가고 중등전문이나 사범학교밖에 못 가니 그럴 바엔 차라리 한국 류학을 가겠다고 한다. 나는 딸애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 듯 하는 말에 그래도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우선 대학시험을 치고 점수가 나오면 그때 가서 한국 류학을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딸애를 달랬다. 하지만 이미 한국 류학을 결심한 딸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딸의 성장과 꿈을 막을 부모도 없다고 나는 류학 수속을 하는 지인에게 딸의 류학 수속을 부탁했고, 2011년 여름 딸애는 교환학생으로 한국 충남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또 한번 딸의 성장과 꿈을 위해 나의 글쓰기 꿈을 접어야 했고, 딸의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집을 비우고 나는 또다시 뼈를 깎이고 기름을 짜이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공사판에서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몸은 힘들어도 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잠을 줄이면서 열심히 글을 썼다. 그렇게 쓴 글은 국내외 여러 잡지와 신문, 방송에 발표되였다.

나는 늘 딸에게 세계화에 대응할 힘을 기르도록 영어공부에 게을리하지 말고, 열심히 배우라고 했다. 고맙게도 딸도 나를 믿어주었고 묵묵히 따라주었다. “쇠는 불과 물 속에서 단련되지만 사람은 공부의 고통과 인내 속에서 단련된다.”는 나의 신념을 믿고 딸은 영어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딸애는 2015년에 충남대학 4년 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그동안 갈고닦은 뛰여난 영어실력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레딩시 샤스타 칼리지 의과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 거기서 딸애는 원주민 학생들과의 언어소통 및 수업에 어려움을 크게 느끼지 못했고 2019년에 4년제 본과를 원만히 마쳤다. 졸업과 동시에 장래 발전성이 있고 수당이 높고 대우가 좋은 한 치과병원에 취직하여 처음 1년을 치과의사 보조로 일하다가 지금은 치과의사로 높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딸은 나와 통화할 때마다 어느덧 성큼 철이 든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물어온다.

“아빠! 딸 때문에 아빠 인생 힘들게 살아온 거 후회하지 않아?”

그때마다 나는 아름답게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락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단다.”

락엽은 잎이 가야 할 길을 최선으로 걸었으니 원망이 없는 것이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잘살아온 잎이 가을바람에 떨어지면서 무슨 원망을 하겠는가. 락엽은 거름이 되는 길이 예비되여있으니 원망이 필요 없다. 락엽은 추함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

주었던 단풍잎을 땅에 놓는다. 그동안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걸어오면서 외롭고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외길을 당당히 걸어온 내 자신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오늘도 래일도 내가 응당 가야 할 길은 원망하지 않고 생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이따금 불어치는 회오리바람에 락엽이 우수수 떨어져 거름이 되려고 뿌리의 곁으로 찾아간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오늘따라 락엽이 떨어지는 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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