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에게서 상감령전투를 듣다

2024-11-06 08:50:21

“부대를 따라 귀국하고 몇년이 지나서 《상감령》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야 당시 우리 포병부대가 포격지원을 한 전투가 상감령 전역의 일부였다는 걸 알게 되였어요.”

연길시 모 양로봉사쎈터에서 만난 김응진 로병사는 가슴에 여러개의 군공메달을, 목에는 기념휘장을 걸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91세 고령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채가 름름했다.

화룡현(현재의 화룡시) 현성에서 5리쯤 상거한 원화동 신원촌 유명한 한의사네 집 5형제중 막내로 자란 김응진은 1951년 3월 17세의 어린 나이에 당중앙의 호소에 적극 호응해 참군했다. 심양시 근교의 북대영에서 중국인민지원군 동북군구 모 퇀 전사로 7개월 동안 군사 지식과 재능 및 군용술어를 주요내용으로 한 훈련을 받았다.

1951년 10월 5일 늦은 밤, 그는 료녕성 안동시(현재의 단동시)에서 출발해 차디찬 압록강을 건넜다. 진씨 성의 포병 퇀장과 그의 수행인원으로 무전수, 경위원, 통신원, 취사원 등 10여명이 포병부대의 선발대로 적진을 탐지하러 떠난 것이다. 그의 신분은 중국인민지원군 모 사 모 퇀 련락원이였다.

밤길에 찌프차 한대, 쏘련제 트럭 한대, 122밀리메터 대포견인차 등을 운전하고 압록강을 건너서 이튿날 새벽에 도착한 곳이 순천이였다. 당시 순천은 곳곳이 폭격을 맞아 원래 헐망하던 초가집들이 거의 다 허물어지고 없어진 상태였다.

적군 폭격기가 밤낮없이 아군 진지나 이동하는 목표물을 향해 폭격해왔기에 선발대는 낮에는 산기슭에 은페해있다가 밤이 오면 힘겹게 전진했다. 밤에 적군 비행기 엔진 소리가 들려오면 산꼭대기에 설치한 아군 방공초소에서 미군 비행기를 향해 기관총을 쏘았는데 적군 비행사에 발견되지 않으려고 전조등을 꺼야만 하는 선발대는 아군의 총알이 나가는 불빛을 빌어 길을 다그쳐야만 했다.

김응진이 소속된 선발대가 순천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미군의 대형 폭격기 1대와 폭격기를 보위하는 전투기 10여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당시 순천에 수건중인 비행장과 철길, 철교가 목표물이였던 것이다. 그때 지원군의 분기식 비행기 몇대가 하늘에 날아오르더니 적군과 접전이 벌어졌다. 치렬한 접전중 미군 비행기 한대가 추락, 이윽고 미군 비행사가 락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37식 돌격총을 손에 든 선발대 대원들은 그 방향을 따라 쏜살같이 달려가서 도망가려는 미군비행사를 포로했다.

당시 적군에 비해 지원군은 무기에서 후근 보장까지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하여 당시의 상황을 ‘좁쌀+보총’이라고 일컫는데 김응진은 자신이 소속된 포병부대의 상황은 ‘좁쌀+보총’에 ‘노새+산포’였다고 말한다.

구경이 200밀리메터인 대포가 너무나 무거워 바퀴가 10개 달린 대포견인차가 끌어야만 했다. 하지만 복잡한 지형의 영향으로 항상 노새 여러 마리가 대포를 끌고 포병들이 함께 밀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적군과 근거리 백병전을 해야 하는 보병에 비해 포병은 전방 관측소에서 무선으로 포격 좌표를 보내오면 목표를 향해 포를 쏘았기 때문에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전우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부대 역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52년 10월 김응진이 소속된 포병퇀은 퇀장의 명령에 따라 김화지역 근처로 이동했고 모 고지를 향해 포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전방 관측소의 좌표 보고와 퇀장의 명령에 따라 포병퇀은 련속 며칠 적군을 향해 포격했다. 김응진 로병사에 따르면 그들은 한명의 사망자나 부상자가 없이 상급부문의 작전명령을 원만하게 완수, 그번의 전투가 바로 상감령전투임을 그는 후날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소속된 포병부대와 함께 상감령전투 등 전투에 여러차례 참가하여 영용무쌍하게 싸운 김응진은 1953년 7월에 중국인민지원군사령부 정치부로부터 3등공을 받았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부터 군공메달을 수여받기도 했다.

1955년 6월에 고향에 돌아온 김응진은 변경지역인 연변의 공안부대에 배치받았다. 1969년, 룡정현공안국 동불사진파출소 부소장으로 근무하던 김응진은 칼을 들고 살인행각을 벌리던 살인미수용의자를 성공적으로 나포해 2등공을 세웠으며 1988년에 무장경찰부대 연변지대에서 정년 퇴직했다.

김응진 로병사는 현재 ‘연길 로병사의 집’ 무료강연단의 주요성원으로 주내의 대중소학교, 주둔부대, 기관단위 등 다양한 군체의 후대들에게 홍색혁명전통교양을 하러 다니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우리는 위대한 조국에 살고 있기에 전쟁에 대한 근심걱정이 없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평화로운 조국에 감사하고 행복감을 동력으로 위대한 조국에 충성하고 더욱 큰 기여를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응진 로병사의 간곡한 부탁이다.

  길림신문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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