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물 이불처럼 덮어주고
새하얀 도화지 펼쳐준다
깊숙이 자리잡고 흘러내리며
순결한 령혼 눈이 되여
가슴속 오물 티없이 씻어준다
시작에 시작을 반복하는 세월
넘어지고 엎어지고 미치게 달려오며
깊이 새겨진 주름 지워주고
또다시 시작이다
삶의 붓을 든다
칠흑같은 어둠이 다가와
한치 앞도 볼 수 없어
붓을 들고 아무것도 그릴 수 없을 때
눈은 새하얀 불빛 되여
나아갈 앞길 비춰주고
때로는 무심코 바라본 먼곳이
아찔하고 희미하고 흔들리여
붓을 들고 고민하고 있을 때
눈은 근시경 되여
뚜렷한 선을 그려주고
정말 먼곳을 상상하며
정말 먼곳을 볼 수 없어
붓을 들고 자리에서 맴돌 때
눈은 천문경 되여
봄날처럼 피여나는 은하계도 보여준다
큰 것을 그리며
작은 것이 잘 보이지 않을 때
큰 것을 그리려면
작은 것도 잘 그려야 한다며
눈은 돋보기 되여
정말 작은 곳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황혼의 도화지 우에
눈이 소복이 내린다
지나온 길도 남은 길도
불타는 노을 속에 밝게 빛나며
삶의 그림 황홀하게 펼쳐진다
눈은 밤을 물들이고
달도 별도 없는 밤을 희미하게 물들이며
하얀 눈이 소리없이 대지를 덮어준다
추울세라 꼭꼭 여며준다
뽀드득뽀드득 속삭임 들리자
나무가지에 앉아 살풋 잠들었던 눈꽃 하나
나그네 얼굴 애무해준다
나그네 걸어온 아름다운 곡선
꽁꽁 언 욕심을 내려놓으면
눈꽃 애무에 뜨겁게 달아오르는 령혼
눈은 밤을 물들이고
나그네는 눈꽃 사랑 길게 펼친다
눈꽃 사랑
추운 밤
하얀 그리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서글픈 사연
입술이 마르고
가슴이 사막으로 되여도
이룰 수 없는 사랑
바라만 봐야 하는 사랑
배나무에 내려 배꽃이다가
살구나무에 내려 살구꽃
이쁘다는 그 모든 꽃으로 피여도
향기가 없고
열매가 없어
긴긴 겨울
사랑 찾아 희망 찾아
만천하 돌다가
봄이 되면
눈물로 말라버리는 꽃
그래도
겨울이 오면 다시
사랑 찾아 용감히 먼길 떠나는
꽃중의 꽃 눈꽃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