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이란 바르고 떳떳한 것 즉 바른 상태, 이상한 데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 낱말이다. 그렇다면 정상이 아닌 모든 현상은 비정상일 것이다. 말하자면 바른 상태가 아닌 것 즉 정상에서 어딘가 벗어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들은 모두 비정상에 속한다는 말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이처럼 그 기준이 선명하게 구분되여있는데 지내보니 이 역시 고정불변의 법칙은 아니였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시대는 놀라운 도전과 창발로 하여 그 변화와 발전이 눈부시게 요란하다. 바로 이러한 눈부심과 요란스러움 속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간격이 좁아지고 있는 바 재래적으로 비정상이라고 단정해온 일부 관점과 관념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였다.
나의 이러한 견해는 우리의 생활문화에 나타난 파격적인 괴상한 현상에서 기인된 것이다. 례하면 머리문화, 복장문화, 오락문화 그리고 언어문자 등 다종다양한 면에서 전통적인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과 계선이 많이 모호해지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럼 아래에 필자가 비정상이라고 단언했던 몇가지 현상에 대한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독특한 멋을 추구하는 한 부류의 젊은이들이 머리에 빨갛고 노랗고 하얀 물감을 올려 원래의 검은 머리에 다른 옷을 입히고 있다. 게다가 남자들의 장발쪽지기에 녀자들의 눈두덩이화장에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과 페디큐어를 바른 발톱까지 등장하여 세상에 현란한 빛을 더하면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자극하는 판이라 어찌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젊음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으로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복장문화의 변혁도 희한하다. 나젊은 녀자들은 배꼽이 다 드러나는 티쌰쯔와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미니스커트로 섹시함을 자랑한다. 청바지는 공장에서 만들 때부터 일부러 찢고 구멍을 내여 살이 드러나고 실밥이 너덜거리는 것이 류행이다.
옛날의 가난했던 시절에는 옷이 찢어지거나 구멍이 나면 천쪼각을 대고 기워서 입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다. 일부러 찢거나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입는 그것을 멋으로 간주하고 있으니 그게 그렇게 멋있단 말인가?
신발도 시대의 락오자가 될세라 전통에 도전하여 새로운 탈변을 이루었는바 월드컵 축구대회의 축구화가 뛰여난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문수는 같지만 색갈이 다른, 즉 한짝은 빨간색 다른 한짝은 노란색의 짝짝이 축구화가 잔디밭에 나타나더니 얼마 안 지나 항간에서도 짝짝이신이 류행되기 시작하였다. 짝짝이신을 신으면 뽈을 더 잘 찰 수 있는지, 걸음이 더 잘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신발의 력사에서는 한차례 혁명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현대인의 미적 추구는 이렇듯 정상의 궤도를 벗어나 다양하고 괴상한 데로 발전하는 게 아닌지 모를 일이다.
언어문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주해가 없이는 뜻을 리해할 수 없는 외래어와 신조어가 범람하여 우리의 원래의 언어문자 환경을 여지없이 소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외래어가 시나브로 우리의 고유어를 먹어버리는데 다른 한편으론 신조어라는 것이 막 줄을 지어 쏟아져나와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머리를 어리벙벙하게 만들고 있다.
‘땡큐’요, ‘굿바이’요, ‘슈퍼’요, 마케팅’이요 하는 외래어의 침투도 막아낼 수 없거니와 날마다 생겨나는 신조어의 범람에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우리네 현실상황이다.
신조어의 간단한 례를 몇개만 들면 즐겁게 감상했다는 것을 ‘즐감’으로, 비밀번호는 ‘비번’으로, 생명보험회사는 ‘생보사’로, 손해배상은 ‘손배’로, 핸드폰 카메라는 ‘폰카’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은 ‘지못미’로, 알고 보니 불쌍한 선생을 ‘알불선생’으로 적는 것 등등 실로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없이 부지기수로 많다.
이러한 외래어와 신조어는 신문과 간행물 그리고 문학창작에 이르기까지 표준어와 같이 어깨 나란히 거리낌 없이 활용되고 있으니 절대로 그 위력을 얕볼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언어학자들이 《신조어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하고 있겠는가? 그런데 매일같이 새록새록 나타나는 신조어를 한번에 다 수록할 수 없으니 몇해에 한번씩 련속적으로 증보판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실로 작은 힘과 짧는 시간으로는 해낼 수 없는 방대한 작업이다.
보다 싶이 국문이 열림과 동시에 밀려든 외래문화의 침투와 그것을 수용하고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접수력은 이미 막을 수 없는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하여 나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이 비정상이라고 단언했던 많은 것들이 이미 정상의 무대에 올라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힐책했던 불가사의한 일들이 더는 비정상이 아니란 말이다.
누군가 “세상이란 워낙 기상천외요 불가사의로 가득찬 신비의 바다”라고 했었다.
세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제 어느 날 문득 또 어떤 ‘비정상적인 신생사물’이 우리 앞에 나타나 정상에 다가서서 노래하고 춤을 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한즉 낡은 것에 대한 미련을 저버리지 못하는 기성세대는 마땅히 현실을 정시하고 관념 갱신에 힘써야 하겠다. 물론 곤혹스러움이야 있겠지만 젊은 세대의 선양과 애착에 대해 존중할 줄 아는 너그러운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헤어스타일이 변하거나 일부러 구멍 낸 청바지를 입고 다니거나 외래어와 신조어가 범람한다고 해서 우리의 하늘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니 상술한 느낌을 개괄한다면 한마디로 늙은이의 공연한 기우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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