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에 송화강변으로 놀러 나간 남주는 벤치에 앉아 즐겁게 하모니카를 불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머리가 허연 웬 로인이 불쑥 나타나더니 남주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병구!… 우리 병구!
-할아버지? 저 병구 아닌데요?
-너 병구 맞아!
-병구가 누구지요?
-내 아들 병구!
-허허 이걸 어쩌지? 할아버지 집이 어디예요?
-몰라…
로인은 머리를 저었다. 그럼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냐고 재차 물어도 그냥 벙어리 흉내만 냈다. 보아하니 치매로 기억력을 상실한 로인이였다. 남주는 어쩌면 좋을가 궁리하다가 로인의 손목을 잡고 근처에 있는 송화강파출소로 모셔갔다. 그러자 경험이 있는 파출소 경찰들은 로인의 호주머니에서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를 찾아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지난 어느 날 점심이였다. 남주는 회사 홍보팀에서 같이 일하며 형이라고 부르는 왕씨와 함께 랭면 먹으러 조선족랭면집으로 갔다. 남주가 랭면을 주문하는데 왕씨가 호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입에 물고 소리내여 훌훌 불더니 하모니카를 놓기 바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남주한테서 하모니카를 배운 왕씨는 하모니카를 입에 댔다가 담배를 피우면 담배맛이 꿀처럼 달다고 했다. 그 하모니카를 남주가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는데 별안간 “병구야!”하고 누군가 등뒤에서 불렀다.
남주가 고개를 돌리니 희한하게도 며칠 전 송화강변에서 만났던 바로 그 로인이였다.
-아니…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때 창문가에 있는 테블에서 한 젊은 녀성이 일어서더니 바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성을 보는 순간, 남주는 또 한번 두 눈이 커졌다. 그 녀성은 얼마 전에 남주와 맞선을 본 적 있는 이름이 송금애란 처녀였던 것이다.
-할아버지? 어쩜 여기 오셔서 이러세요?
그녀가 로인을 모셔가려는데 로인은 안 가려고 고집을 부렸다.
-허허 전번에도 말씀 드렸잖아요. 전 할아버지 아들이 아니라고요.
-어머나… 우리 할아버지를 아시는 분인가요?
그녀가 남주를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하자 남주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예… 며칠 전에 송화강변에서 이 로인님을 파출소로 모셔간 적 있습니다만…
-호… 고마워라! 그럼 그날 우리 할아버지를 파출소로 모셔다드린 분이시네요.
순간, 반짝하고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하지만 당돌한 그녀의 눈에서 남주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제가 맥주를 사서 올릴가요?
-아니 됐습니다. 오후에 출근을 하니까.
-그럼 음료수라도…
그녀는 복무원을 시켜 돼지순대 한접시에 고급음료 두병을 남주네 상에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원래 상으로 건너갔다. 그때까지도 그 상엔 그녀의 어머니인 듯싶은 나이 지긋한 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녀자 누군지 아세요?
-누구지?
-형수님이 소개해줘서 제가 맞선을 봤던 녀자…
-엉? 그럼 우리 집사람과 같은 교연실에 있다는 그 처녀교원?
왕씨는 고개를 돌려 그 처녀를 건너다본다.
-그럼 자네와 만났던 인연이 있다고 순대며 음료수며 올려주는 건가?
-아니, 나하고 만난 일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아요. 내가 길 잃은 자기 할아버지를 파출소로 모셔다드렸다고 지금 그 턱을 내는 거래요…
왕씨의 부인은 제18중학교 교원인데 이번 학기 인물도 곱고 마음도 착한 조선족 처녀가 연구생을 졸업하고 같은 수학교연실에 배치되여왔다고 했다. 그래서 왕씨 부부의 중매로 남주는 학력도 같고 나이도 동갑이라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챙기게 되였다. 남주가 그녀한테 먼저 전화를 걸었더니 상대측에서도 저으기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호호 남선생님은 하모니카를 아주 잘 분다고 하더군요.
-예… 저한테 재간이라곤 그것 하나뿐입니다.
이튿날이면 휴일이라 그들은 래일 오전 9시에 송화강 홍수방지기념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오실 때 남선생님은 손에 하모니카를 들면 안될가요?
-그럼 송선생님은?
-호호, 전 손에 꽃 한송이…
그런데 그날 저녁 갑자기 급하게 문건작성 임무가 떨어져 남주는 자료를 뒤지며 문건을 작성하느라고 그만 새날이 밝을 무렵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누울 땐 딱 한시간만 눈 붙이고 얼른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깨여나니 글쎄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한 9시가 다되여갔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여있었다. 바삐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로 뛰여나가 택시를 잡아탔는데 그때서야 깜빡 하모니카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남주가 송화강기념탑에 이르렀을 때는 약속 시간이 50분이나 지난 뒤였다. 그때까지도 손에 꽃을 든 송금애 교원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저가 약속한 시간을 어겨서…
-혹시 어떤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
-왜 손에 하모니카는 들지 않은 건가요?
그녀는 남주의 변명 따위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손에 들고 있던 꽃도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였다. 그녀가 남주가 건 선글라스마저 못마땅해하는 눈치여서 얼른 안경을 벗으며 눈에 피가 져서 건방지게 이런 걸 착용했노라고 묻지도 않는 해명까지 했다. 이윽고 둘은 강가에 마주 서서 얼마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녀는 전화 한통을 받더니 사정이 생겨 실례해야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렇게 망신스러운 맞선을 보았는데 미상불 그녀는 남주와 더 사귈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
남주와 왕씨가 그쪽 상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니 그녀와 할아버지 그리고 그녀의 모친인 듯싶은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랭면집을 나서고 있었다.
-방금 여기로 왔던 로인은 저 처녀의 할아버지가 아닐 걸.
왕씨는 안해한테서 들은 말을 꺼냈다.
송금애와 녀동생은 중학시절 어떤 마음씨 고운 선생님댁에 하숙하면서 그댁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었는데 얼마 전 그댁의 사모님이 중병으로 앓게 되자 부부가 병치료를 떠나게 되였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잠시 료양원에 보내려고 하였는데 그 소식을 알고 송금애 교원이 할아버지를 자기 집으로 모셔왔고 시골에 있는 어머니까지 데려와 로인을 돌보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남주의 귀에 그런 이야기는 별로 반갑지도 않았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그날 저녁, 그 처녀한테서 전화가 왔다.
-전 18중에 있는 송금애예요. 남선생님 기억나시죠?
-?
-미안해요. 제가 마음 착한 남선생님을 많이 오해한 것 같아요… 선생님이 저의 할아버지를 파출소로 모셔다드린 분 맞죠?
‘아니 이 녀자도 치매에 걸렸나 왜 이러지?’
-그런데 한가지 물어봅시다. 혹시 그날 남선생님은 송화강변에서 하모니카를 불지 않았어요?
-예. 하모니카를 불었습니다.
-호호 그렇지! 제가 맞췄네요. 그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가 남선생님을 찾아간 거였네. 제가 지금 모시고 있는 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신 박병구 선생님이 하모니카를 아주 잘 불었거든요.
-그러면 왜 송선생은 점심에 만났을때 이런 말을 하지 않은 겁니까?
-호호호 점심에요? 점심에 남선생과 만난 녀자는 저가 아니라 저의 녀동생이였어요.
-예?… 그럼 둘이?…
-예 맞아요! 우린 쌍둥이 자매예요. 저의 이름은 송금애, 걔 이름은 송은애, 걔는 지금 박사공부중이예요…
남주와 송금애는 오는 휴일날 원래 그 자리에서 원래 그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남주가 이번엔 꼭 손에 하모니카를 들고 가겠노라고 말하자 처녀는 소리 내여 웃었다.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