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돌솥을 만들고 있는 개숭군.(출처:연변TV)
우리가 느끼고 표현하는 음식의 맛에는 무엇보다 ‘추억’이 강력하게 작용한다. 곱돌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에서 어머니의 맛이 느껴지니 우리가 느끼는 맛의 형용은 혀끝보다 머리가 좌우지함이 틀림없다. 우리의 미각과 후각의 감각은 우리를 음식과 련결된 인생의 특정한 순간, 상상의 세계로 데려간다. 그릇과 음식이 서로 궁합을 맞추어 맛을 돋우고 추억과 정서를 부른다.
그래서일가?
개숭군의 곱돌솥제작공장에서 만든 곱돌 제품들.
유독 겨울에 곱돌그릇에 담긴 음식을 보면 그에 어울리는 추억과 정서를 함께 식탁에 올려놓게 되는 기분. 굳이 시골 출신이 아니더라도 한겨울 많은 눈이 내리는 날 곱돌그릇을 보게 되면 지붕 우에 하얀 눈이 소박하게 쌓인 시골집을 떠올리게 된다. 생각만 해도 포근하고 친근하다.
우리의 식탁은 다채로운 재료와 디자인의 그릇들로 가득하다. 합성수지, 유리, 금속 등 현대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그릇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뽐낸다.
그중에서도 자연에서 얻은 천연재료인 돌로 만든 그릇에서 우리는 자연의 선물과 장인의 손길 그리고 조상들의 지혜를 느낀다.
곱돌솥을 만들고 있는 개숭군.(출처:연변TV)
《동의보감》에서 곱돌은 ‘활석’이라고도 불리며, 주로 약재로 쓰이는 광물이지만 가끔 건축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차거운 성질의 곱돌은 방광에 염증이 있거나 몸 안에 열 기운이 있을 때 열을 식혀주면서 로페물을 배출시키는 성질이 있다.
연변박물관에서 민속연구원을 지낸 한광운 민속학자는 “곱돌은 열 전도률과 열 보존성이 좋으며 원적외선과 미네랄 등을 방출해 인체에 매우 유익한 광물입니다. 그래서 곱돌솥에 밥을 지으면 뜸이 고르게 들고 눋지 않으며 밥맛이 좋고 쉽게 식지 않습니다.”라고 우리 곱돌그릇의 우수성을 알린다.
곱돌솥을 만들고 있는 개숭군.(출처:연변TV)
고대유적들을 찾아가보면 옥석, 마노, 수정, 청석, 대리석, 곱돌과 같은 색갈이 아름답고 광이 좋은 돌로 만든 여러가지 장식품들을 많이 보게 된다. 고대시기에 사람들은 옥돌로 된 공예장식품을 금은보다도 더 귀중한 보물로 삼았다. 그 후 봉건왕조의 여러 조대를 거쳐서 돌공예는 고도로 되는 발전을 가져왔으며 전문적인 장인들이 나타났다. 봉건왕조시기에는 그 업종이 세분화되여 석장(石匠: 돌 다루는 장인), 옥장(玉匠: 옥돌 다루는 장인), 주장(珠匠: 구슬 만드는 장인), 마조장(磨凿匠: 매돌 만드는 장인) 등 전문수공업자들이 나타났다.
곱돌솥을 만들 원재료 채취에 나선 개숭군.(가운데)
곱돌솥제작은 돌공예의 주요한 구성부분으로서 그 력사가 매우 유구하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많이 활용하여왔다. 일찍 기원전 10세기경에 조선반도에서는 이미 곱돌로 만든 생활용품들을 사용하였다.
1924년에 출판된, 조선음식을 정리한 《조선무쌍신식료리제법》에서는 “밥 짓는 그릇은 곱돌솥이 으뜸이요, 오지탕관이 그다음이요, 무쇠솥은 셋째요, 동노구가 하등”이라고 적었다. 1809년 발간된 《규합총서》에서도 밥과 죽은 돌솥이 으뜸이라고 나온다. 열이 골고루 잘 전달돼 재료가 빨리 속까지 익으니 밥 짓고 죽 끓이는 조리도구로 곱돌솥만한 것이 없다. 게다가 밥맛도 좋고 누룽지와 숭늉마저 구수하다.
곱돌솥은 이렇게 우리 민족의 가장 좋은 취사도구중 하나로 우리의 밥상을 지켜왔다.
한광운은 “그 때문인지 궁중에서 따로 수라상을 받는 임금이나 왕비, 량반들은 곱돌솥에 따로 지은 밥으로 식사를 했습니다.”라고 전한다.
새옹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곱돌로 만든 솥에 꼭 한그릇씩만 밥을 짓는데 숯불을 담은 화로에 올려놓고 은근히 뜸을 들여 지으니 요즘 식당에서 나오는 돌솥밥과 비슷하다.
조선의 관리들 역시 주로 돌솥밥으로 식사를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이 상으로 돌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후원에서 활을 쏘는 것을 구경하다 과녁을 명중시킨 관리에게 돌솥 한벌씩을 상으로 내렸다는 내용이 적혀있고 《성종실록》에도 왕이 승정원과 홍문관의 관리에게 돌솥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돌솥의 용도 역시 다양해서 밥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차도 끓이며 채소도 료리했는데 고려말 리규보의 《동국리상국집》에서는 돌솥에다 차물을 끓여 마셨다고 했다. 조선초 서거정 역시 돌솥에 남새를 데쳐 먹었다고 했으니 용도는 지금보다 다양했다.
이쯤 되니 문득 흐뭇한 생각이 든다.
‘우리가 돌솥밥을 먹을 때 옛날 임금이 수라상 받는 기분을 상상한다면 밥맛이 더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가?’
사실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도 주방에서 쓰는 조리기구중에서 돌솥을 최고로 여겼다. 11세기 말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인 소동파는 자신의 시를 빌어 “구리로 만든 솥은 비린내가 나고 무쇠로 만든 솥은 떫어서 좋지 않으니 돌솥이 물을 끓이기에 가장 좋다.”고 읊기도 했다. 9세기초 당나라의 학자인 한유도 “누가 산의 뼈를 깎아서 돌솥을 만들었을가.”라며 돌솥을 례찬하는 시를 지었다.
화룡에 가면 오래전부터 지역 명물로 된 곱돌솥 제작공장이 있다. 조선족곱돌솥 제작공예는 지금 성급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고 개숭군은 조선족곱돌솥의 대표적인 기능보유자로 있다.
개숭군은 “화룡은 예로부터 그릇을 만들기에 좋은 돌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룡성진 흥서촌 부근의 산에 돌솥을 만들 때 쓰는 활석이 많습니다.”라고 운을 뗀다.
겨울 해살이 차겁게 내려앉은 작업장, 귀가를 맴도는 건 정겨운 망치소리 뿐이다. 단단한 곱돌덩어리가 낯선 풍경으로 놓여있다. 하지만 이내 능숙한 손길이 닿자 거친 표면은 부드럽게 다듬어지고 숨겨져있던 아름다운 결이 모습을 드러낸다.
망치와 끌, 숫돌과 사포, 장인의 손길을 따라 곱돌은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듯 령롱한 빛갈을 뽐내는 그릇으로 다시 태여난다.
긴 손잡이 달린 곱돌장사귀, 룡정시조선족민속박물관 소장, 20세기 30년대에 제작된 취사도구로 작은 솥의 일종이다.
“곱돌그릇의 가치는 단순히 기능성에 있지 않습니다. 돌이 지난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내여 음식의 품격을 더욱 높여주는 데 있습니다.”
곱돌장인 개숭군은 돌의 생김새와 결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지녔다. 돌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그릇에 담아내는 예술적인 감각 또한 놓치지 않는다. 망치질 한번, 끌질 한번에 곱돌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다. 그의 손길은 마치 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듯하다.
화룡은 예로부터 곱돌솥 생산지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곳에서 나는 곱돌은 질이 뛰여나 돌솥제작에 안성맞춤이였고 수많은 이들이 질 좋은 곱돌을 리용하여 돌솥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박길봉(1890년생)은 뛰여난 돌솥 제작기술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는 제1대 조선족곱돌솥 제작장인으로 불리웠다. 박길봉은 독자적인 조선족곱돌솥 제작 기술과 공예 그리고 체계적인 제작순서를 확립했다.
귀형 손잡이 곱돌장사귀, 룡정시조선족민속박물관 소장, 20세기 30년대에 제작된 전통적인 조선족 취사도구로 작은 솥의 일종이다.
그의 기술은 제2대 장인인 리종석에게 전수되였다. 1901년에 화룡 청두촌에서 태여난 리종석은 박길봉의 제자로 스승의 기술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기술혁신을 통해 곱돌솥 제작을 수공에서 기계화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종석의 뒤를 이은 개숭군은 조선족곱돌솥 제작공예의 맥을 잇는 제3대 전승인이다. 10살이 되던 해인 1964년에 길림성 부여현에서 아버지를 따라 화룡시 룡성진 단결촌으로 이사했다. 한족인 그가 정착한 단결촌은 조선족 주민이 주를 이루는 마을이였다. 어린시절부터 조선족들과 함께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를 접하게 된 개숭군은 마을 린근 조선족곱돌솥 제작장인들의 솜씨에 매료됐다. 어릴적부터 곱돌솥 제작에 깊은 흥미를 느낀 그는 오늘 장인의 길을 걷게 되는 운명과 마주한 것이다.
“그때 곱돌솥을 만들던 조선족장인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족인 내가 조선족곱돌솥에 관심을 보이자 아주 반갑게 제자로 맞아줬습니다. 그렇게 만든 돌솥을 소수레에 싣고 다니며 팔아 어려운 시절 생활에 보탬을 했습니다. 그때 배운 기술 덕분에 지금 밥을 먹고 삽니다.”
개혁개방 이후 화룡의 청두, 와룡, 홍서 등 마을에서 앞다퉈 곱돌솥제작공장이 세워지면서 전통적인 조선족곱돌솥은 큰 인기를 끈다. 하지만 1995년 이후, 화룡의 많은 조선족곱돌솥공장들은 자금, 기술, 인재 부족으로 돌솥품종이 단일적이고 판매 경로가 막히면서 련달아 생산이 중단되는 위기를 맞았고 지금은 유일하게 개숭군의 곱돌솥공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민속학자 한광운은 “조선족곱돌솥은 우리 나라에서 또 활석돌솥이라고 부릅니다. 주로 장백산지역의 활석광석을 리용해 가공됩니다.”라고 전한다.
덮개 달린 곱돌솥, 룡정시조선족민속박물관 소장, 20세기 40년대에 제작된 조선족의 전통적인 취사도구이다.
이처럼 조선반도의 곱돌솥 제작공예는 우리 민족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후 몇대에 걸친 장인들과 조선족곱돌솥 제작공장들의 전승과 발전을 거쳐 차츰 우리만의 특색이 있는 조선족곱돌솥공예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족곱돌솥은 초창기는 수공제작이며 전통적인 도구를 리용해 보통 원형, 손잡이형, 무뚜껑형으로 제작됐고 일부 곱돌솥제작공예가들은 조선족전통식기를 모방하여 돌솥을 만들기도 했다.
한광운은 우리의 곱돌솥 제작장인들이 조선족음식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신제품 개발을 해왔다고 강조한다.
전통적인 곱돌솥 제작기술에 현대적인 감각과 아이디어를 접목했는데 이러한 노력은 돌솥 계렬 제품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단순히 밥을 짓는 용도를 넘어 비빔밥용, 찌개용, 구이용 돌솥 등 다양한 종류의 료리를 조리할 수 있도록 기능과 다자인을 개선한 제품들은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돌솥은 조선족음식산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많은 음식점들에서 돌솥을 활용한 다양한 음식을 개발하면서 조선족음식의 경쟁력을 강화했다.
이처럼 조선족곱돌솥 제작장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혁신은 전통공예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트렌드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했고 돌솥은 이제 단순한 주방기구를 넘어 조선족음식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지금 개숭군의 공장에서는 5개 계렬 30여종의 다양한 곱돌솥제품을 기계화된 시스템을 통해 생산하고 있다. 전통적인 멋과 현대적인 기술이 어우러진 그의 곱돌그릇은 아름다운 외관과 다양한 품종을 자랑하며 동북3성은 물론 북경, 천진 등 국내 시장과 한국, 일본 등 해외 시장에서도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특히 최근 우리 지역이 관광도시로 발전하면서 지역의 음식문화가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 그중에서도 곱돌솥밥은 려행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별미의 음식으로 손꼽힌다.
“요즘은 국내 주문이 부쩍 늘었습니다. 얼마 전에 새롭게 주문예약을 한 고객은 연변에 려행을 왔다가 맛본 곱돌솥밥 맛에 까무러칠 번했다면서 공장을 찾아왔더라구요. 바람직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흐뭇했습니다.”
우리의 전통공예 명맥을 잇고 있는 일에 그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차거운 돌은 그렇게 장인의 손길을 거쳐 따뜻한 온기를 품은 그릇으로, 소박하지만 정갈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릇으로, 식탁 우에서 빛나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따뜻한 그릇으로 새로운 삶을 얻고 있었다.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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