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수리와 장식□ 최진옥

2025-02-28 08:40:18

세집에서 근근득식하다가 결혼하여 4년 만에 내 집을 갖추게 되였다. 화룡시가지에서도 제일 높은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어 시구역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이였다. 집주인은 단위에서 분배해주는 새집을 타서 이사 가고 지금까지 세를 주었다는 집인데 30평방 되나 마나 한 집에 칸칸을 막아 출입문만 하여도 여섯개나 되였다.

집에 들어서니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족식 온돌이여서 온돌 높이가 무릎 우로 올라섰고 문마다 기름때가 덕지덕지 깔렸다. 부엌에는 석탄재와 쓰레기를 꼴똑 다져 넣었다. 하수도에는 기름때와 물때가 두툼하게 깔렸고 창문유리는 본바탕을 알아보기 힘들게 먼지와 기름때에 절어있었다. 어디를 보나 눈살이 찌프려지는 정경이였다. 아무리 세집이라도 얼마나 게으른 주부이면 이런 환경에서 생활해왔을가 도통 리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면 나무랄 데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내 집을 장만하는 것이 제일 큰 소원이였던 만큼 힘에 부칠 것 같아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황차 북쪽에는 집에 붙혀 지은 석탄창고가 있고 15평방메터 좌우 되는 앞뜨락도 있어서 움을 팔 자리도 넉넉하였다.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집을 사고 이사를 다그쳤다. 우선 먼지털이를 하고 회칠을 하얗게 한 후 가마를 걸었다. 부엌에 다져 넣은 석탄재와 쓰레기를 한삽, 한삽 퍼서 내다버리고 하수도 청소를 말끔하게 했다.

이사짐 정리를 간단하게 하고 보니 꽤나 살 만한 공간이였다. 춥고 습하고 연기가 부엌아궁이로 내달아 나오고 물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데다가 하수도와 변소마저 변변하지 못하던 세집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활 열리는 것만 같았다. 전등불빛 아래 새하얗게 회칠한 벽을 마주하니 둥둥 뜬 기분이였다.

이사한 이튿날부터 기름때가 덕지덕지 깔린 문을 하루에 하나씩 씻어냈다. 해묵은 기름때는 세제와 소다를 사용하면서 솔로 빡빡 문질러도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출입문과 창문을 원 모습이 살아날 때까지 씻고 닦고 하고 나니 온몸이 해나른해났다. 다음에는 앞마당의 쓰레기청소도 내 혼자 힘으로 틈틈이 해냈다. 유리쪼각, 낡은 신, 낡은 옷, 석탄재, 생활쓰레기들이 온 뜰 안에 두툼하게 깔려있었다. 한소보치씩 머리에 이고 공공쓰레기장으로 날라갔다. 아마도 해방패자동차로 한바곤은 실히 넘쳐날 것 같았다.

그런데 두돌 지난 딸애가 온돌에 올라갈 때면 온돌 높이 때문에 너무 힘들어했다. 보기가 참 안스러울 지경이였다. 지켜보다 못한 남편이 어느 날인가 문득 온돌을 고친다고 선포했다. 딸애가 편리하도록 높은 온돌을 낮은 온돌로 고쳐야 했다.

일군을 쓸 형편이 못되였다. 모든 일을 우리 부부가 함께 손잡고 해내야 했다. 부엌을 마스고 온돌을 뜯어내고 칸칸이 막은 벽을 쳐내고 하수도까지 털어냈다. 온 집안이 아수라장이다. 우리의 부지런한 손길이 닿아야 면모가 일신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었다. 집 수리와 장식을 시작한 것이다. 부엌을 다시 쌓고 온돌을 다시 놓았으며 찬장도 벽에 붙여 만들고 채소와 사발을 씻는 싱크대도 내 키에 어울리는 높이에 만들었다. 사용하기 편리하게 하수도 구멍을 두곳에 만들었다. 주방과 침실 사이에는 유리창문도 새롭게 냈다. 안전 때문에 낡은 전기선도 새것으로 바꾸었다. 밖에는 하수도를 깊숙하게 파고 앞마당에는 채소움도 깊숙하게 팠다. 하수도와 움은 돌로 네벽을 올리쌓고 철근 콩크리트로 덮개를 덮었다. 이듬해 해동이 되기 바쁘게 기둥이 썩어서 볼품없이 찌그러진 울바자도 새롭게 세웠다.

집수리가 시작되여서부터 동네분들이 자주 구경왔는데 모두들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큰 공사를 누구의 손도 바라지 않고 부부가 힘을 합쳐 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이 집이 이제야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다는 것이 모두의 평판이였다.

한해 한해 살아가면서 콩크리트로 바깥벽을 바르고 낡은 집을 허무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쓸 만한 기둥감이나 창문을 헐값으로 사들여 베란다도 새로 지었다. 움을 파고 남은 축축한 땅에는 곰취 뿌리를 옮기고 집미나리를 심었다. 그 나머지 땅에는 초봄에는 배추, 시금치, 쑥갓, 깨, 상추 씨를 뿌리고 5월말에는 배추와 시금치와 쑥갓 그리고 사이사이에 고추와 가지 모를 심었으며 8월말에는 깨와 가지를 심었던 자리에 영채씨를 뿌리면서 한해에 세벌 농사를 지어먹었다. 서리가 내리기 직전이면 고추를 뽑았다.

고추는 하나하나 상하지 않게 알뜰하게 따서 보관하면 양력설까지도 먹을 수 있었다. 고추잎을 따서 반찬을 하면 그것이 또한 별미였다. 자그마한 뜨락에서 별로 채소를 사지 않아도 늦은 봄부터 이른 가을까지는 채소 걱정이 별로 없었다. 싱싱하게 자란 채소를 보면서 “우리 안해를 닮아서 앞마당의 채소들이 참 잘 자랐네.” 하는 남편의 익살도 가끔 귀를 간지럽혔다.

겨울이면 뜨락에 나무달대를 달고 명태를 말리웠다. 처음에는 한톤으로 시작한 명태말리기가 한해 한해 지나면서 불어난 것이 몇년 후에는 다섯톤까지 말리게 되였다. 출근을 하고 여유시간에 말리는 것이라 장사에 문외한이였던 나는 말린 한돈 명태에서 다른 사람들의 절반값도 벌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입이 꽤 짭짤하였다.

십여년이 지난 2002년 단위의 덕분으로 층집이 차려졌다. 남들이 무척 선호하는 4층이였다. 마침 명태말리기로 벌어놓은 돈이 집값과 맞먹었다. 남편은 다른 집들이 하는 장식을 살펴보고 어떤 재료에 어떤 무늬에 어떤 색상에 어떤 모양으로 장식했다고 하면 우리는 남다르게 무늬와 색상을 선택하고 모양을 설계했다. 남편이 상점마다 돌아보며 재료를 둘러보고 오면 내가 점심시간을 타서 확인한 후에 우리 부부의 의견이 맞으면 샀다. 운비를 절약하느라 모든 재료를 상점에서부터 자전거에 싣고 남편이 앞에서 자전거를 밀면 내가 뒤에서 붙잡으면서 집까지 날라왔다. 그리고 나와 남편은 힘을 합쳐 어깨에 메고 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바줄로 올리 끌면서 4층까지 운반했다. 전기톱을 빌려서 나무오리를 켜내고 대패로 남편이 한가지 한가지 밀어서 재료를 준비하였다. 섬유판 한장 한장을 본을 떠서 남편이 베여내면 내가 풀을 바르고 둘이 함께 붙히군 했다. 톱밥과 대패밥도 비닐자루에 꽁꽁 넣어서는 자전거로 집에 싣고 와서 불을 땠다. 남들은 장식하는 일군들을 불러 짧은 시간내에 장식을 끝내고 당해에 집에 입주했지만 우리는 자체로 하다 보니 이듬해 1월에야 집에 입주하게 되였다.

2009년 11월, 이런저런 원인으로 또다시 낡은 집 한채를 사서 이사를 하게 되였다. 역시 세를 주던 집이였는데 얼마간 비여있던 집이라 곰팡이 냄새가 물씬 풍겼다. 거기에다가 일층이여서 온돌에 따뜻한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겨울 한철이면 춥다 못해 발이 시려나는 것은 물론이고 양말에 덧신까지 신고 있어도 무릎까지 올리 시려났다. 경제적 사정이 너무 어려웠던 나는 감히 다시 집수리를 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세해 겨울을 버티다 못해 봄이 찾아오자 남편과 상의했다. 집수리를 하지 않으면 너무 추워서 몸에 병이 생길 것 같다고 했다.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던 남편이 현실을 정시했던지 드디여 동의하였다. 마침 집에 있던 딸애까지 세 식구가 힘을 합쳐 집수리에 달라붙었다. 원래의 낡은 가구들을 몽땅 뜯어내고 낮고 좁은 문벽을 쳐내고 남쪽 침실과 중간 침실 사이에 출입문을 내였다.

온돌을 몽땅 들어냈다. 아이구머니나, 온돌의 콩크리트 두께는 무례 8센치메터 남짓했고 위생실 바닥의 두께는 12센치메터나 되였다. 열공급을 아무리 잘해주어도 온돌이 따뜻할 수가 없었다. 열공급관을 놓으면서 딸애는 잣대를 쥐고 다니면서 감독하였다. 재료 구입부터 운반까지 우리 손으로 하고 디자인도 우리 취향에 맞게 하였다.

수리와 장식은 집구조에 이채를 돋구어준다. 집수리는 낡고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어 넣는다. 집장식은 텅텅 빈 공간에 깔고 맞추고 붙히고 이것저것 갖추어놓아 공간을 채워서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들고 생활하기 편리하게 조절한다. 남다른 것을 선택하고 남다르게 설계하고 꼼꼼하게 붙히고 알뜰하게 손질하는, 힘들고 고단한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두 손으로 우리 생활의 보금자리를 만들어놓았다. 내가 설계하고 우리 부부가 손 맞추어 장식한 집이라서 절약도 했지만 그보다도 내 취향에 딱 맞고 내 눈에 딱 들어오는 디자인이여서 아쉬운 것이 없어 너무 기분 좋다.

살아가는 일도 집수리와 장식과 똑같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맞추어 넣고 빈 공간에 없던 것을 채워 넣는다. 모르던 것을 배우고 틀린 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우점을 배워가면서 살아간다. 다른 집 장식에서 좋은 것을 섭취하고 나만의 개성을 살려 장식을 남다르게 했던 것처럼 모르는 것은 배우고 다른 사람의 생활방식에서 좋은 것을 따라배우며 나만의 특징, 우리 부부만의 특성을 살려 우리의 개성 대로 우리 부부만의 삶의 방식 대로 살아가고 있다.

40년을 바라보는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는 남과 다른 생활을 해왔다. 아기자기한 날보다는 티격태격했던 날들이 더 많았고 웃은 날보다는 눈물 흘린 날들이 더 많았다. 한달간의 수입과 지출을 평형시키고 일전 한푼 아끼느라 모지름을 썼으며 생각 밖의 지출이 생겨 한달 지출에 큰 구멍이 생길가 근심걱정 속에서 마음을 졸이였다. 불 같은 성격에 자기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하는 남편 앞에 여우짓 한번 할 줄 모르는 나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야말로 남편 앞에서 녀자다운 애교 한번 부릴 줄 모르고 고운 투정 한번 부릴 줄 모르는 곰같이 미욱한 안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이 가정을 영위해온 것은 우리만의 개성이 따로 있었고 배우고 버리고 채워가는 우리만의 삶의 방식이 따로 있었으며 더우기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의 개입도 없이 우리 나름 대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 풀어가면서 한번 또 한번의 가정위기를 용케도 넘겨왔다.

우리 부부가 손잡고 땀 흘리며 함께 수리하고 장식한 집, 남들처럼 뜨르르하게 갖추어놓고 살지는 못해도 나는 아담하고 아늑하고 소박한 내 집이 무척 마음에 든다. 우리 부부의 로고와 심혈이 고스란히 슴배여있는 집이라서 더 마음이 끌린다. 털고 닦고 쓸고 씻는 일상 속에서 나의 하루가 덧없이 흘러가는 것만 같지만 그것이 내 집을 알뜰하게 가꾸어가고 내 가정을 행복하게 영위해가는 내 생활의 한 모퉁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일상이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손잡고 집장식을 하던 그 맵시로 우리 부부는 손잡고 우리의 생활에 이채를 돋구어줄 수 있는 마음의 장식도 해가고 있다.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채를 돋구어주는 장식품이다.

  집안에 밝은 해살이 찾아든다. 내 마음에도 밝은 해살이 찾아들고 있다.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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