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부모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문제아들의 가출이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된 적이 있었는데 근년에 와서는 집고양이들이 가출하여 들고양이로 되는 일들이 나타나 새로운 문제로 되고 있다.
고양이들이 가출한다 하여 대단한 문제로 될 것은 없지만 자그마한 문제라 해도 문제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오랜 세월 집고양이는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었다. 깜찍하고 귀엽고 깨끗하게 생긴 데다가 재롱부리기를 좋아하고 말을 잘 듣고 또 쥐잡이능수로 자리를 굳혔으니 사랑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옛말로 될 줄이야. 그렇게 조용히 살던 집고양이들이 더는 옛날의 고양이가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필자는 어느 날 밤거리를 거닐다가 쓰레기상자에서 비닐봉지를 헤집고 사람들이 내버린 음식찌꺼기를 먹고 있는 밤고양이를 보았다. 한번은 해변 도시에 갔다가 차들이야 달리거나 말거나 큰길을 가로질러 뛰여가는 무리고양이를 보았다.
내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친구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는 듯이 “세월이 좋아지니 고양이도 변한거지.”라고 하는 것이였다.
그렇구나. 고양이도 변했구나!
쓰레기통을 뒤져도 접시밥보다 더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육류점이나 생선시장을 빙빙 돌면서 매대 주인의 칼끝에서 나가는 부스러기만 주어먹어도 고기썰썰이를 모르고 얼마든지 잘살 수 있으니 어찌 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확실히 시장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물질생활 수준이 전례없이 제고된 새로운 형세에서 고양이들도 사상을 해방하고 관념갱신을 이루어 더는 전통적인 생활습관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생활모식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고양이의 가출현상이다. 고양이들도 바깥세상과 접촉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형세를 두루 살펴보고 나서 마침내 집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주인의 보살핌이 없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였고 그리하여 고양이들은 저들의 고루한 낡은 관념을 깨뜨리는 용감한 행동 즉 가출이라는 파격적인 행위를 보여준 것이다.
하긴 접시굽에 발라주는 밥 한숟가락과 비린내 나는 물고기뼈 한토막을 받아먹고 따뜻한 가마목에 누워 낮잠을 실컷 자고 나서 밤이면 또 쥐를 잡아먹을 수 있었으니 팔자 치고는 상팔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시대의 변혁은 동물세계의 뿌리 깊은 전통관념까지 흔들어놓았는바 가출한 집고양이들은 들고양이로 신분을 바꾸고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다 보니 더는 쥐잡이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였다.
그러니 살 때를 만난 것은 쥐들이였다.
더는 천적인 고양이 때문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되였고 더는 고양이의 발톱에 찢기는 일이 없게 되였으니 말이다. 고양이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마음 놓고 창고와 주택에 기여들어 쌀과 고기를 도둑질하여 굴속에 쌓아놓을 수 있고 앞이발을 갈기 위해 가구와 옷과 책을 마음대로 썰어댈 수 있으니 이 어찌 아니 좋을손가?
최근의 한 소식보도에 의하면 상해의 어느 주택단지에는 강아지만한 쥐들이 살고 있는데 전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단언하건대 쥐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깔보는 것으로써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러한 쥐들의 왕성한 번식력과 막심한 파괴력은 이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예기치 못한 피해를 가져다줄 것이다.
주지하다싶이 근년에 와서 남방의 어느 농촌에서는 수천마리의 쥐무리가 가을논밭에 기여들어 영글어가는 농작물을 절단 내는 통에 농사를 망치였고 또 어느 고장에서는 쥐들이 굴을 어찌나 많이 파놓았는지 제방뚝이 무너지는 일까지 발생했으니 그 막심한 피해 앞에서 사람과 쥐의 새로운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그렇다고 들고양이를 붙잡아다가 책임을 추궁할 수도 없고 그 전부의 책임을 가출한 고양이에게 들씌울 수도 없는 것이 현실상황이다. 왜냐하면 오늘과 같이 쥐들이 활개 치는 세상의 도래는 단지 가출한 고양이의 탓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것은 고양이보다 쥐를 훨씬 잘 잡고 또 엄청 많이 잡는 뱀과 올빼미와 독수리 등에 대한 사람들의 무리한 포획이 낳은 결과라고 한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무지와 몰상식에 의해 생태계의 먹이사슬이 끊어지고 생태환경이 파괴된 것이 그 주요원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결코 가출한 고양이의 잘못을 두둔하는 근거로는 될 수 없다. 그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쥐잡이라는 사명을 저버린 가출고양이들의 책임만은 덮어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미 가출한 고양이를 다시 집으로 불러와 쥐잡이를 하도록 동원한다는 것은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야 한다. 새로운 쥐약에 대한 연구는 인명을 해치는 역효과를 고려해 보다 신중하게 검토되여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선 고양이를 대신할 수 있는 효능이 우월한 전자고양이를 많이 생산하고 보급해야 하겠다. 가장 좋기는 쥐들의 행동을 추적하고 쥐들의 소굴을 폭파할 수 있는 개미만한 드론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드론이라는 이 현대무기를 마땅히 쥐와의 전쟁에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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