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성도시 인민공원은 초목이 우거지고 해빛이 찬란하다.
허국장 장군의 동상 앞에 석실련합중학교 촉화분교의 20여명의 학생들이 조용히 서있다. 사천성퇴역군인사무청이 조직한 항전영렬사적 선전활동이 이곳에서 막을 올렸으며 가렬 처절한 항일의 봉화가 재차 학생들의 눈앞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허국장은 사천성 성도 사람으로 1897년에 태여났다. 1938년, 67군 161사 483려 소장 려장으로 있으면서 부대를 거느리고 사천을 떠나 항일투쟁에 참가했다.
1938년 9월초, 허국장은 명령을 받고 황매(지금의 호북성 황강 황매현) 등지의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483려 장병들을 이끌고 적들과 이틀 동안 격전을 벌렸다. 처음에는 대포와 고사포 지원이 부족해 사상자가 컸지만 후에 공격방식을 야간 기습으로 바꾸면서 적과 1개월간 대치했다. 10월 중순, 호북 동부의 상파하전투에서 일본군은 비행기와 대포를 동원하여 허국장 부대의 최전방 진지를 미친 듯이 폭격했고 일본군 보병은 기병과 함께 진격해왔다. 허국장은 부대를 측면에 배치했다가 시기가 성숙되자 맹렬히 공격을 퍼부어 일거에 적을 격파했다.
1941년 가을, 허국장은 혁혁한 전공으로 150사 부사장으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7월에 사장으로 임명되였다. 악서회전에서 그는 명령을 받고 진시와 례현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11월, 항일투쟁 정면전장 대규모 회전의 하나인 상덕회전이 시작되였다. 일본군은 10여만명을 끌어모아 진공을 개시했고 허국장은 직접 일선에 나가 부대를 지휘하면서 완강하게 반격해 진지를 고수했으며 150사는 적군 2000여명을 살상했다.
국지적 승리는 잔혹한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 어려웠다. 일본침략자의 주력부대는 계속 맹공을 퍼부었고 전시상황은 극히 위급했다. 이전 과정에서 허국장 부대는 적에게 포위되였으며 그의 신변에는 참모, 경비 등 300여명밖에 없었지만 일본군의 보병과 기병은 1000명이 넘었다.
11월 20일 밤, 일본군은 추시(지금의 호남성 상덕시 도원현 추시진)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허국장은 보총을 들고 직접 일본군에게 항격했는데 함께 있던 장병들은 200여명에 불과했다. 허국장은 인원을 2개 팀으로 편성해 그와 부사단장 양자립이 각각 1개 팀을 거느리고 어둠 속에서 포위를 돌파할 준비를 했다. 포위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허국장은 총탄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가 다음날 새벽 4시경에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추시가 일본군에게 함락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허국장은 권총을 들어 장렬하게 순국했다.
허국장은 순국 후 중장에게 추서되였다. 그의 시신은 150사 부관주임 왕우성이 성도로 호송했고 성도 각계 인사들은 충렬사에서 허국장 장군을 위해 추모식을 거행했다. 2014년, 허국장 장군은 민정부의 제1차 저명한 항일 영웅렬사와 영웅군체 명부에 선정되였다.
“허국장 장군은 희생될지언정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드높은 민족 절개를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으로 일본침략자에게 중국 군민의 굳센 항전 결심을 선언했다.” 사천성 영렬정신 강연단 성원들의 설명을 듣고 있던 학생들의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다.
신화사 기자 사백 장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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