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에 깃든 이야기□ 최장춘

2026-04-10 09:37:07

창문은 건물의 눈동자이다. 보통 사람을 마주하면 얼굴에서 가장 먼저 눈을 바라보듯 집을 상대할 적엔 창문을 먼저 바라보게 된다. 집의 양식과 색상은 어떠한지, 창문의 크기와 전체 벽 면적의 비례는 맞는지 등 시각적인 요소를 통해 우리는 가옥 실내구조, 또는 생활동선까지 짐작할 수 있다.

창문을 향한 인간의 마음은 생존을 위한 본능에서 비롯된다. 지난 60년대, 내가 어릴적 살아온 집은 국가방산이 관할하는 주택이여서 정기적으로 창틀에 뼁끼칠을 해주고 추운 겨울에 대비해 창문사이에 톱밥을 두툼히 넣어주었다. 하늘땅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철 승화현상이 심해 유리창엔 새하얀 성에꽃들이 피여났는데 때론 폭설을 뒤집어쓴 소나무 같고 때론 물고기비늘 비슷했다. 그러다 아침해살이 펼쳐질 무렵 갖가지 도안들이 하나둘씩 아쉽게 사라져버렸다. 그럴 때면 나는 제꺽 그 빈자리에 뻐스랑 기차랑 그려넣으며 창문에 낀 서리와 뜬김이 되도록 오래 머물기를 바랐다.

보통 학교창문은 살림집보다 훨씬 컸다. 해살이 유리창을 뚫고 은구슬마냥 쫘르르 쏟아져 들어올 즈음이면 교실 안의 분위기도 유난히 밝아진다. 너나없이 집중력이 좋아지고 사제간의 질의문답도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헌데 언제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였다. 간혹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면 벽쪽에 기댄 학생들이 우르르 일어서서 창문 쪽을 기웃거리는 바람에 드문드문 수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창문유리 한장값이 엄청 비쌌다. 한번은 곁에 앉은 친구가 새총을 갖고 장난하다가 그만 창문유리를 깨뜨려 선생님한테 혼쭐이 났다. 학교에 소문이 쫘─ 퍼져 배상은 물론 학생들 앞에서 검토서까지 읽어야 했다.

그만큼 창문을 아끼고 사랑하는 학교의 기풍은 대단했다. 청소당번들은 먼저 젖은 걸레로 창문을 닦은 후 마른 걸레로 물기를 닦아냈으며 이어 종이를 똘똘 뭉쳐쥔 채 얼룩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정성들여 닦는 것이 기본이였다.

한때는 창문에 종이를 붙이는 바람이 불기도 했었다. 종이를 가늘게 잘라서 가로세로 붙였기에 바깥의 풍경은 오리오리 찢어진 필림쪼각처럼 보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조귀먹쟁이’ 별명을 가진 갑부가 지금의 해방로 보행거리 가운데에다 2층짜리 양옥을 지었었는데 게딱지같이 낮다란 주변의 오막살이와 달리 오기가 번득거리는 커다란 창문을 보면서 행인들은 부러워할 대신 이질감이 생겨 대부분 왼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그런 이질감도 후날 거리의 여기저기에 다층주택이 륙속 들어서면서 곧 흔들리기 시작했다. 널직한 베란다와 큼직한 창문의 유혹이 큰 데다 전망이 좋아 항간에서 창문에 대한 선망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아마 그때로부터 아빠트창문을 장식하는 바람이 분 것 같다. 층집에 입주할 때 창문 변두리에 사각프레임을 붙이고 울긋불긋한 화분통을 줄느런히 배렬한 다음 화려한 카텐을 쳐서 창문을 꾸미기도 했다.

요즘은 건축자재가 다양한 데다 창문의 모양새도 옛날 원림화랑의 풍격을 본받아 더 다양해졌다. 어떤 집들에서는 멀쩡한 창턱 밑의 벽을 몽땅 쳐버리고 쇼윈도를 방불케 하는 확 트인 통창문을 만든다. 신형 알류미늄소재 창틀에 유리를 두세겹 끼워넣어 보온효과를 향상시킨 기능성 창문이 이미 보편화가 되였다. 게다가 길녘 아빠트 창가에는 야간장식조명을 설치하여 창문마다 일종 거리풍경을 미화하는 예술품으로 업그레이드되였다.

열린 창문과 닫힌 창문의 색상은 다르다. 창문을 많이 그린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은 다양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열린 창문은 하나같이 선이 선명하고 미래지향적인 밝은 색상이 짙어 우아했다. 반면 만화가들이 그린 닫힌 창문은 엉뚱하게 비뚤지 않으면 지나치게 정교하고 화려했다. 사회현상의 배후에 숨겨진 굴절된 진실을 암시해주는 화법이다. 희망으로 열린 창문에 비해 닫힌 창문은 적막을 헤쳐나오려는 리성과 성숙된 사색이 잔물결마냥 찰랑거린다.

창문은 심령을 대변한 문화이자 또한 인격이기도 하다. 창문에 비낀 그림자에서 한 인간의 됨됨이가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창문에 관한 재미있는 소설도 많다. 내가 읽은 <창문>이라는 단편소설에서는 전신마비 환자 둘이 같은 병실에 누워있었는데 그들 사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적고 있다. 벽쪽에 누운 환자는 하도 갑갑하여 창가에 누운 환자에게 수시로 바깥의 풍경을 물었고 창가의 환자는 아까는 숲속에 갖가지 새들이 날아다녔고 지금은 련인들이 정답게 손잡고 길을 거닌다고 생동하게 말해주었다. 창가의 환자가 죽은 후 벽쪽에 누운 환자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 서둘러 창가로 자리를 옮겼고, 그제서야 밖은 꽉 막힌 높다란 담장외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곁의 환자에게 삶의 의욕을 북돋아주려고 거짓을 꾸며낸 이야기는 마치 밤새껏 담쟁이그림을 창문가에 추켜세워 한 생명을 구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진한 감동의 여운을 남겼다.

몇년 전 나는 장가계 천문동을 유람한 적이 있다. 그것은 ‘조물주’가 만들어낸 자연의 창문이였다. 높이 130여메터, 너비가 근 60메터인 신주를 놀래운 기적의 창턱에 다가서니 삼라만상이 프레임 속의 화폭처럼 뚜렷이 비껴왔다. 홀연 두보의 “창문 넘어 서쪽산에 천년눈이 쌓여있고 문 앞에는 먼 오나라 배가 정박해있네.”라는 시구가 떠올랐다. 활짝 열린 공간을 타고 피여난 흰 안개가 혼돈 속의 기억을 더듬는 듯 가장자리를 맴돌며 떠날 줄 몰랐다. 이보다 큰 창문이 또 어디 있으랴, 유람객들은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느라 왁작 떠들었지만 천문동은 묵묵부답이였다. 분명 뭔가 말할 듯 말 듯 망설이다가 통채로 굳어진 창문이 던진 의미는 너무 컸다. 대체 무슨 뜻일가? 한동안 해답이 궁해진 나한테 문득 이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더 큰 창문이 우리 몸속에 있지 않을가하는 령감이 뇌리를 쳤다. 아무렴 저녁 창가에 내려앉은 별무리는 마음이 토해낸 등잔불이요, 새벽창문에 낀 찬이슬은 마음속 응어리가 부서진 자국일지도 모르니깐.

자고로 마음 다스리기를 첫자리에 놓은 건 창문에 묻은 때는 지우기 쉬워도 마음에 투영된 흠집은 지우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증삼이 하루 세번 성찰한 고담은 마음의 탕개를 늦추지 않고 시시각각 경종을 울려 삶의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평생 한점의 부끄럼 없이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높은 차원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말이 쉽지만 실천이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청신한 아침공기를 페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마음의 창문을 깨끗이 닦는 명상이나 습관이 현대 사람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진정 마음속 창문이 투명해야 이 세상도 맑고 따뜻하게 비쳐든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창문은 단지 집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숨결이다. 아무리 화려한 창문이라도 그 너머에 진실한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름다운 풍경도 메마르기 마련이다. 반대로 작고 낡은 창문일지라도 맑은 눈빛과 따뜻한 가슴으로 닦아낸다면 그 안에는 언제나 봄날의 해살이 가득할 것이다.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2号 | Copyright © 200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