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속의 고향마을□ 손홍범

2023-03-31 09:05:04

내 고향 량수벌은 좀 특이하게 생겼다. 조선족 부락은 거개가 북쪽으로는 산기슭에, 남쪽으로는 강을 두고 있다. 그런데 량수마을은 북쪽은 높이 쳐다 보이는 언덕이고, 언덕에 올라서면 먼저 넓은 벌이고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 그제야 산이 나타난다.

교원사업을 할 때 장백산 아래 첫 동네라는 숭선으로 유람을 간 적이 있다. 그곳 지형이 량수와 같았다. 량수도 장백산천지 주위의 마을 지형이 아닐가?

언덕에 올라서면 드넓은 량수벌이 한눈에 안겨온다.

동쪽켠은 살구꽃에 잠겨있는 영화촌이라고 부르는 마을인데 해마다 꽃피는 계절이면 수많은 유람객의 발목을 잡는다. 연변의 유명한 화가 임천의 유화작품에도 많이 오른 곳이다.

남쪽에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우에는 허리가 동강난 대교가 엎디여있다. 전쟁시기에 고향이 겪은 무시무시한 사건을 견증해 주는, 어디서도 보기드문 유물이라 하겠다. 지금은 유람지 유적으로 무수한 관광객을 불러오고 있다.

서쪽을 바라보면 유서 깊은 두만강이 기나긴 세월 모래를 날라 쌓아 만든, 바라보는 눈뿌리가 시리도록 아득히 펼쳐진 만경대벌이다. 량수의 곡창이라고 할만하다.

량수마을 풍경은 또 어떠하더냐!

이른아침 마을 뒤 높은 언덕우에 올라서면 발 아래로는 넘실거리는 흰 안개바다가 펼쳐진다. 량수마을과 마을 앞 푸른 논 어데라 없이 흰 비단 같은 안개에 잠겨 보일 듯 말듯하다.

그 무엇으로 형용하랴. 몽롱미를 자랑하는 그 모습. 너울 쓴 첫날각시마냥 어여쁘기만 하여라!

안개속의 집집마다 울바자엔 나팔꽃이 피여나고 열콩이 주렁졌으리라. 뜨락마다 노란 호박꽃 피고 파란 오이 드리우고 푸른 파 이슬에 젖었으리. 밤새 익은 도마도는 포기마다 매달려 빨간 얼굴 자랑하며 코흘리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한집 두 집 굴뚝엔 파란 연기 모락모락 피여 오를 때  마당에서도 풍로불을 피기 시작하리라. 강아지는 허리 늘구며 채석에서 내려오고 병아리들은 울바자 밑에서 벌레 찾아 삐약거리리.

아. 안개속의 고향마을아. 너는 기지개 켜며 잠을 깨는 내 사랑의 녀인마냥 신선하여라!

아, 고향마을. 안개속의 고향마을아, 너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어여쁘더냐!?

나는 구라파 철학가 스피노자의  륜리학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는 사람의 정감에 관하여 기하학적 공식으로 수십개 종목으로 나누여 언급했는데 그 가운데 이런 공식이 있다. 한 사람이 다른 한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지 모를 때에는 모름지기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 마음속에 품은 사랑의 리유를 모를 때이다. 그러니 련인의 깊은 마음속이 똑똑히 보일 때 보다 알릴 듯 말 듯 몽롱하게 보이면 상상의 꽃너울에 감겨 더 아름다워 보이리라. 안개속의 고향마을도 그와 같이 신비롭다 하리라.

그렇다면 련애중인 그대는 더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가? 만일 그러하다면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좋아하는가고 물을 때 그 속마음을 흰 안개로 가려두시라. 알려주지 말고 그냥 미루어보시라.

ㅡ결혼식을 올린 후 알려드리겠어요.

ㅡ아기를 낳은 후 이야기하지요.

ㅡ아이가 대학 간 후 보자요.

ㅡ아이가 결혼한 후 털어놓지요.

마지막 영영 리별을 앞두고 이 못난 나 하나만 믿고 끝까지 살아온 바보 같은 사람아, 내가 어디가 좋았어? 라고 물으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시려나.

ㅡ모르겠어요. 그냥 저냥 좋았어요. 저 세상 가서도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으면 아,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을 두고 목석인들 그 어찌 마음이 찢어지지 않으랴.

어느 누가 말했던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그대여, 사랑의 리유를 굳이 찾아 무엇하랴! 까닭을 모르고 리유없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이리라. 신비로움을 죄다 알고 싶어 애타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참사랑이리라.

아. 고향마을아. 너는 내 사랑. 내 녀인! 부디 길이길이 예뻐다오. 꿈에만 보이지 말고 내 앞에 신기루로 나타나다오. 그러면 이 내 마음 천방지축 네품에 얼싸 안기리라. 그리고 오래오래 흐느끼리라. 이 가슴 후련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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