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이른 아침, 차를 몰고 안도현 소재지에서 동쪽을 향해 달리니 황금물결이 출렁이는 논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은 안도현 석문진 경성촌의 ‘로성의 벼(卢城之稻)’ 핵심 산지였다.
‘로성의 벼’는 《신당서·발해전》에서 유래되였다. 기록에 따르면 ‘로성의 벼’는 모래처럼 무겁고 옥처럼 빛나며 미음은 우유처럼 진하고 진한 향이 넘쳐 한때 황실 공물이였다. 오늘날, 심원한 력사를 자랑하고 있는 비옥한 이 땅은 자연의 향기를 발산하고 행복의 향기가 넘치고 있다.
마을 곳곳에 새겨진 ‘위대한 조국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여러 민족의 광범위한 교류와 융합을 촉진하고 중화민족의 대단결로 중국식 현대화를 촉진하자’ 등 표어들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더욱 생기가 넘쳐보이게 했다.
마을의 ‘단결거리’와 ‘치부거리’ 교착로에서 곡식 재배호인 류조복(60세)의 집을 찾았다.
“마침 잘 왔습니다. 지금 논이 제일 볼 만할 때입니다. 열흘이나 보름이 지나면 바빠질 것 같습니다!” 마당에서 농기계를 보고 있던 류조복은 기자에게 어느 것이 펄프를 치는 기계이고 어느 것이 모내기 기계이며 어느 것이 수확기인지를 상세히 소개하면서 “농사일이 지금은 예전처럼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전 과정이 기계화로 되여있어 시간을 절약하고 효률이 높으며 수익도 매우 좋아 농촌 생활이 아주 여유롭고 행복합니다.”고 부언했다. 류조복은 원래 안도현 송강진 사람이였는데 25살에 결혼한 후 현성과 더 가까운 경성촌으로 이사해 벼재배를 배우기 시작했다. 초기에 종자 선택, 종자 말리기, 종자 담그기부터 천막 씌우기, 모종 키우기, 모내기까지 복잡한 절차가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한번은 온실 안의 벼 모종이 크기가 다르고 어떤 벼는 심지어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을 발견했다. 모내기 날까지 11일밖에 남지 않자 류조복은 초조해났다. 급한 마음에 그는 촌에서 벼재배 경험이 가장 풍부한 조선족 할아버지를 청해 상황을 살피고 그의 지시에 따라 창고에 물을 넣고 매일 환기를 하면서 해빛, 온도 및 습도를 보장함으로써 큰 손실을 피했다.
이렇게 류조복은 농업생산에서 끊임없이 모색하고 공부하면서 벼 재배의 달인이 되였다. 벼 재배 면적도 처음의 0.5헥타르에서 7헥타르로 늘였고 년간 수입은 몇백원에서 수만원으로 증가했다. 빈곤해탈 사업이 시작된 후, 경성촌은 도급단위인 성민족사무위원회의 지원하에 쌀 가공 산업을 발전시켰고 쌀가공공장을 영입하여 ‘백년경성’ 쌀 브랜드를 구축했는바 경성촌의 쌀의 부가가치를 크게 높였다.
2016년, 류조복은 딸의 도움으로 온라인으로 자신의 쌀을 홍보하고 판매해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평소에 위챗과 콰이써우 플랫폼에서 저의 시골 생활, 논 풍경, 새농촌의 풍모를 찍어 올립니다. 현재 팬이 수천명을 넘었습니다.” 류조복은 이같이 말하면서 예전에는 쌀을 기껏해야 현성까지만 팔 수 있었고 집으로 배달해도 킬로그람당 4원 정도에 팔았으며 일년 내내 수입이 많지 않아 돈을 모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에는 쌀을 가공하고 포장하여 온라인을 통해 전국 각지로 판매하고 있으며 제품은 킬로그람당 최고 12원에 팔린다면서 해마다 음력설 전에 3.5만킬로그람의 쌀을 모두 팔아버릴 뿐만 아니라 촌민들을 도와 인터넷으로 쌀을 팔아주고 있다고 자랑했다.
점심이 다가오자 맛있는 음식향이 류조복의 정원을 가득 채웠다. 류조복은 “예전에는 집이 있고 먹을 것이 있으며 새 옷을 입을 수 있으면 행복한 생활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면서 먹고 입고 숙박까지 모든 면에서 품질을 중시하고 건강을 추구하고 있으며 차고에는 두대의 소형 승용차가 주차되여있는데 한대는 집과 밭을 오가며 농사일에 사용하고 다른 한대는 농한기에 현성을 오갈 때 사용한다고 자랑을 늘여놓았다.
갈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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