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력사의 한페지를 간직한 고성촌
─당년의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를 찾아서

2025-07-07 09:01:08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는 동만의 가장 큰 항일유격근거지중 하나이자 동북항일련군 제2군의 중요한 발원지이다."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는 연길시 의란진 서북부에 위치해있다. 이 근거지의 범위는 당시의 왕우구와 구룡평 서쪽, 의란하 상류의 북동과 남동 등지가 포함되는데 지금의 연길시 의란진 고성촌일대이다. 현재 당시의 흔적들이 남아있지 않고 복원된 유적이나 홍색 교양, 전시 시설이 건설되여있지 않으며 몇개의 비석들만 여러곳에 흩어져있는지라 이 구간의 력사를 직관적으로 되새겨보는 데 조금은 어려움이 있었다.

고성촌에 있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부 옛터’ 비석.

이곳의 항일력사를 좀더 료해하고저 찾은 주당위 당학교에서 당사당건설교연실 주임 강개 교수가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는 동만의 가장 큰 항일유격근거지중 하나이자 동북항일련군 제2군의 중요한 발원지로서 우리 지역 항일력사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는 말에 취재를 주저했던 마음을 접어두고 비석들이 세워진 대개의 위치를 알고 나서 바로 유적지를 찾아나섰다.

연길시내로부터 50킬로메터를 달려 구룡촌을 지나는 길옆에서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비석을 찾았다. 비석 뒤면에는 “1932년 여름에 창건… 1934년 9월에 사방대로 전이”라고 씌여져있었다.

구룡촌을 지나는 길옆에 있는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비석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되기 전부터 이곳은 원래 비교적 좋은 대중기반이 형성되여있었다. 1930년에 설립된 왕우구당지부는 군중조직을 만들어 반제반봉건 투쟁을 전개하고 이듬해 왕우구당위가 설립된 후에는 대중들을 령도해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벌렸다. ‘9.18사변’ 후에는 우수한 당원, 단원을 선발하여 돌격대와 유격대를 조직하였고 1932년 여름에는 기존의 대오를 토대로 정식으로 왕우구유격중대를 창설하였다.

구룡촌을 지나는 길옆에 있는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비석

중대는 편성된 후 수차 적들과 교전하면서 투쟁의 수요에 따라 고성촌 북구에 병기제조공장을 세웠다. 공장에는 10여명의 기능공을 두었는데 그들은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를 단조하고 권총과 보총을 수리했을뿐더러 자체로 ‘연길폭탄’도 잇달아 시험 제작하였다. 이 무기들은 여러 전투에서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병기공장이 위치했던 자리가 지금은 경작지로 되여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발굴된 단칼, 폭탄과 같은 유물들을 연변박물관 3호 전시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1932년 가을에 중공동만특위와 중공연길현위 기관이 북동으로 전이하여 전체 동만지구의 항일투쟁을 령도하면서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였다. ‘중공동만특위와 중공연길현위 기관 옛터’ 비석은 고성촌 마을 안에 있었는데 비석 바로 뒤로는 아담한 민가의 모습이 보였다.

고성촌에 있는 ‘중공동만특위와 중공연길현위 기관 옛터’ 비석.

1932년 11월 2일, 정식으로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가 창설되였고 이듬해 1월에 연길현항일유격대대가 설립되고 나서 왕우구유격대는 연길현유격대대에 편입되였으며 대대부는 왕우구에 마련되였다. 1933년 봄부터 연길현항일유격대는 적들과 수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벌렸다. 1933년 겨울에 일본군이 야만적인 ‘초토전술’을 적용해 왕우구 고성일대를 공격하였지만 유격대는 각개격파 전술로 적의 ‘토벌’을 짓부셨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제5련 제3패 주둔지’ 비석.

1934년초에 이르러 유격대는 이미 300여명으로 발전되였으며 같은 해 3월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으로 확대 편성되였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부 옛터’ 비석은 ‘중공동만특위 및 중공연길현위 기관 옛터’와 불과 10메터가량 떨어져있는 다른 한 민가 앞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길을 안내해주던 고성촌 촌민 우빈(72세)이 비석에서 올려다보이는 언덕 우에 항일전쟁시기의 학교와 훈련장 옛터도 있다고 하여 올라가보았다. 항일유격근거지라는 표식은 씌여져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이 되여있었다. 우빈은 자기가 어렸을 때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어디쯤에 건물이 있었고 어디쯤에 훈련장이 있었으며 건물이 어떤 모양이였는지를 설명해주어 머리속으로나마 그 형상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외 전 합수촌(지금은 고성촌으로 합병)에서 전 고성촌으로 향하는 길옆의 산언저리에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제5련 제3패 주둔지’ 비석도 찾았다. 함께 간 고성촌 촌민들이 비석 뒤로 보이는 산을 촌에서는 ‘달라자산’이라고 부른다면서 우세대에서 전해 들은 이 산에서 일어난 전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항일혁명근거지 인민의 후손으로서 이곳의 력사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이야기들을 열정적으로 토해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순간 감동을 느꼈다.

고성촌 촌민이 항일시기 학교가 있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1934년 가을부터 적들은 더욱 야만적인 ‘초토전술’로 세번째 ‘대토벌’을 개시하였다. 적들은 근거지에 들어와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고성촌, 련화동 등지에 집단부락을 만들어 유격대와 군중의 관계를 끊어냈다. 적들의 토벌과 학살에 항일 대중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사방대일대로 전이해 적과의 투쟁을 계속했다.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는 2년 남짓한 기간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근거지의 형성과 발전은 동만 항일투쟁의 토대를 닦아놓았고 연길 여러 민족 인민의 항일투쟁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하였다. 항일전쟁시기 불굴의 정신으로 투쟁을 이어갔던 이 땅에는 오늘날 평화와 희망이 넘치고 있다. 고성촌은 사방이 푸른 산에 둘러싸여 정연하면서도 청신한 느낌을 준다. 도로는 깨끗하게 청소되여 있었고 집집마다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있었다. 마을에 상주하는 촌민은 300여명인데 전통적인 밭농사외 양봉업, 식용균양식 등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1933년 중공동만특위의 당내 간행물.

연변박물관에서 찾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의 유물들.

고성촌당지부 서기 진수영은 “최근년간 고성촌은 림하경제 발전구도를 최적화하고 림하자원 활용 수준을 높이며 림하경제 제품 공급을 늘이는 것을 발전 방향으로 당지부가 인솔하는 합작사를 세워 다양한 산업을 시도하고 있다.”면서 향후 촌 집체수익을 늘이고 촌민들을 치부의 길로 이끌기 위해 여러 면에서 꾸준히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변박물관에서 찾은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유물.



연변박물관에서 찾은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유물.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는 아직 홍색교양 플랫폼이 건설되여있지 않아 찾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하여 력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산천초목은 항일전쟁시기 피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의 력사를 더한층 깊게 그리고 생동하게 료해할 수 있는 플랫폼이 생겨 ‘홍색보루’가 시대 신인들을 교양하는 영원한 ‘정신적 등대’로 되길 희망하는 바이다. 

글·사진 전해연 기자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终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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