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와 닿는 따스한 볕이 벌써 봄임을 말해준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해해년년 어김없이 순환한다. 이는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오늘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산책을 나갔다. 내 발길은 거침없이 부근의 공원으로 향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원은 강을 끼고 있어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동네 주민들은 물론, 유람객들도 많이 찾는 쉼터이고 나의 지정된 산책지이기도 하다. 립춘도 퍽 지났는지라 날씨가 많이 따스해졌다. 병아리 가슴털처럼 노오란 봄해살이 내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준다. 매일 한시간 산책할 수 있는 이 시간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공원의 산책로를 거닐면서 길게 심호흡을 한다. 내 안에 켜켜이 쌓인 묵은때들이 정화되여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공원의 익숙한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걷는다. 이 시간 만큼은 잠시나마 허드레일에서 해탈되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여유작작하게 걷노라니 살랑살랑 귀가를 스치는 봄바람이 너무 정답게 느껴진다. 마음이 즐겁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침저녁으로 마구 옷깃을 파고 들던 매서운 칼바람은 어느샌가 누그러졌고 겨우내 꽁꽁 말라있던 나무가지에도 땅속 깊숙이 박고 있던 뿌리가 보내주는 영양분을 머금고 많이 나긋나긋해져 새움을 틔울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살짝 나무가지에 힘을 줘보니 아닌 게 아니라 꺾이지 않고 휘우듬히 활등모양을 이룬다. 겨울의 추위를 이겨낸 가지를 점도록 보고 있노라니 저 남쪽에서 연분홍 치마자락을 휘휘 날리며 사뿐사뿐 봄이 걸어오는 소리가 내 마음에 아름다운 교향곡을 연주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사계절중에서 봄을 가장 좋아한다. 그것은 봄이면 삼라만상이 눈을 뜨고 만물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겨울 내내 죽은 듯이 보였던 마른 나무가지가 파릇파릇 피워낸 신록이 대지에 초록 비단옷을 입히는 것도 신기하고 산에 들에 온갖 약초와 나물들이 새록새록 돋아나기를 바라고 들꽃들이 다투어 피여나기를 바라며 언 땅에서 저들을 녹여주는 따뜻한 봄해살을 기다리는 것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한 매력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겨울 뒤에 오는 따스함과 푸르름이야말로 봄이 안겨주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아닐가? 그러니 자연을 주관하는 조물주가 선물한 봄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그래서 또다시 오고 있는 봄을 맞이하노라니 마음이 경건해지면서 이순의 나이에도 그 어떤 새로운 열망을 가져보고 희망을 품게 된다.
봄의 정취에 한껏 젖어 걷고 있는데 문득 땅에서 파아란 색이 꼬물꼬물 자신의 미약한 존재로 봄을 알리고 있었다. 풀이였다.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생명을 틔우고 싱그러운 봄기운을 담은 푸릇푸릇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겨우내 마른 나무가지만으로 채워진 풍경을 보다가 생기 넘치는 초록빛을 접하는 순간 내 입에서 가느다란 탄성이 새여나왔다. 보잘것없는 풀이지만 신선했고 성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파릇파릇 고개를 내민 풀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겨우내 어두운 땅속에서 모든 것을 인내하며 지내다가 여린 몸으로 세상구경을 하려고 남먼저 봄을 알리면서 언 땅을 뚫고 빠금히 고개를 내미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가를 생각하니 이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나는 파아란 풀을 보고 또 보았다. 너무도 흔한 봄풀이지만 봄풀의 완강한 생명력에 내심 감탄이 나온다. 이름도 없고 향기도 없고 뭇사람들의 어여쁨과 존중을 받지 못하는 한낱 평범한 풀에 불과하지만 대자연의 품속에서 나름 대로 저만의 매력으로 조용히 봄을 알리고 이 봄날에 한줄기 생기와 활력을 부여하는 풀이 한없이 돋보였다. 가장 평범한 풀이지만 꽃과 나무와 더불어 살면서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자연에 순응하며 자기 사명을 다하는 봄풀, 나는 보고 또 보았다.
태여날 때부터 키 작은 풀들은 비바람에 꺾여도 다시 일어서고 목마름도 오롯이 잘 견뎌낸다.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짓눌려 여지없이 바닥에 쓰러졌다가도 다시 살아나며 불에 타고 해볕에 시들어도 비가 오면 끈질기게 다시 머리를 쳐들고 우뚝 몸을 세운다. 풀은 송곳 하나 꽂을 수 있는 틈새에서도 허기를 달래며 꿋꿋이 살아가는 완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나는 풀을 무척 좋아한다.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이 풀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릿해온다.
소박하고 평범하고 생명력이 강한 풀 앞에서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누군들 살아오면서 풍파를 겪지 않으랴만 나는 살아오면서 어지간히도 많은 풍파를 겪었다. 허나 나는 생활의 역경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이겨왔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열두살 때 내가 허리를 다쳐 누워있을 때 아버지께서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
“얘야, 절망을 딛고 일어나면 희망은 너를 안아줄거야. 난 우리 딸이 봄풀의 완강한 생명력을 닮아 인생을 꿋꿋이 살아가면 좋겠다.”
나의 열두살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끔직했던 한해였다. 친구들이랑 함께 농촌에 일하러 갔다가 주의하지 않아 허리를 다친 나는 그 뒤로 방에 누워 지내야 했다. 다친 허리를 치료하기 위해 엉덩이에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면서 온몸을 바들바들 떨던 그 아픔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허리에 수많은 침을 꽂는 아픔을 견뎌야 했고 허리에 뜸을 뜨면서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참느라 혀를 깨물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도 내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봄풀 같은 완강한 의지력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격려해주셨다.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씀은 어린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내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심어주었다. 아버지가 내 마음에 드팀없는 신념을 심어주었기에 퇴직을 앞두고 내 생명을 갉아먹는 암이란 불청객이 찾아왔을 때에도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견강한 생명력과 완강한 의지로 암과 맞서 싸웠으며 아들이 사업하느라 진 빚 200여만도 기꺼이 떠안았다.
살면서 많은 좌절이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나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열심히 앞을 보고 달렸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봄풀 같은 의지력이 있었기에 그 어떠한 환경에서도 나는 늘 희망을 품고 긍정적으로 삶을 대할 수 있었다. 인생의 길에서 좌절을 겪고 또 그것을 하나하나 이겨내면서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좌절은 그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터득하였고 좌절도 언젠가는 웃으면서 회억할 수 있는 인생의 귀중한 추억의 한자락으로 남는다는 것을 터득하였다.
이 시각 자연의 한복판에 서서 온몸으로 고요하고 따스한 해볕이 백금처럼 빛나고 있는 봄해살을 맞아본다. 풀과 속삭이면서 지난 나의 삶을 돌아보노라니 감개가 무량하다. 그러면서 그 누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눈길조차 주지 않아도, 사람들의 무심한 발걸음에 밟혀도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다시 척추를 세우는 풀의 지혜를 닮으리라 생각해본다. 자연이야말로 인간을 가르치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으면서 남은 여생도 풀처럼 살리라 다짐해본다.
이때 한줄기 봄바람이 불어왔다. 파릇파릇 봄색갈을 담은 봄바람이 부드럽게 내 뺨을 감싸주고 풀들의 향기가 내 마음에 스며든다. 언제나 나를 잊지 않고 또다시 찾아와 나를 깨우쳐주고 세월을 깨우쳐주는 봄이 한없이 고맙다.
그래, 이제 남은 여생도 풀처럼 소박하게 평범하게 그러나 씩씩하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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