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건 서부의 상항현 계구진 대령하촌에는 장엄한 혁명기념정이 우뚝 솟아있다. 이 정자가 기념하는 항일영웅이 바로 료해도이다.

1941년, 강소 률양 당마전투에서 료해도는 신사군 16려 기관과 소남항일근거지 간부들의 포위 돌파와 전이를 엄호하기 위해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 괴뢰군과 혈투를 벌리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는데 그때 나이가 겨우 32세였다.
대령하촌은 혁명의 기점촌이다. 1929년 4월, 대령하촌에 농민회가 설립되였는데 입당한 지 얼마 안되는 료해도는 주요 조직자의 하나였다. 료해도는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혁명에 참가한 후 조직의 배치에 따라 여러차례 농민폭동에 참여했다. 그는 또 적위대, 소년선봉대, 아동단, 부녀회 등을 발전시켰으며 향, 구 쏘베트정부를 건립하고 령도직무를 맡았다.
혁명형세가 발전함에 따라 1931년 민서홍군병기공장은 대령하촌으로 옮겨졌다. 1933년 9월부터 1934년 7월까지 료해도는 선후하여 새로 설립된 중국공산당 대영현위 령도와 중국로농홍군 대영독립영 영장 등 직무를 맡았으며 지속적으로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 장정 후 남겨진 각급 당정간부와 홍군장병들은은 대령하촌 옆의 쌍상산 등지에 근거지를 세우고 간고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료해도가 령도하는 대오도 장기간 이곳에서 활약했다.
이 기간, 반동세력은 각종 악랄한 수단을 써가며 근거지 군민들에게 미친 듯한 보복을 전개했다. 료해도는 어머니, 처자가 피살된 대가를 치렀지만 시종일관 의지가 강철 같은 공산당원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민족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 료해도는 1938년 3월 신사군 2지대를 따라 소환항일전선으로 북상해 4퇀 정치부 주임을 맡았으며 소남항일근거지 투쟁을 회복, 건립하는 과정에서 선후하여 수십차의 전투에 참여하고 지휘했다.
1941년 11월 28일, 소남항일근거지 당정기관, 16려 부대주둔지인 강소 률양 당마촌이 갑자기 적의 기습을 받았다. 료해도는 먼저 포위를 돌파하는 것을 거절하고 500여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자기보다 7배 많은 일본군과 괴뢰군을 저격하여 28일 새벽부터 오전 10시경까지 격전을 벌리다가 불행하게 총탄에 맞아 희생되였다.
료해도가 희생된 후 신사군 군부는 전군에 전보를 보내 “료해도는 우리 당과 아군의 우수한 간부로서 당과 혁명을 위해 10여년간 분투하고 충실하고 확고하며 용감하고 책임지며 간고하게 소남근거지를 창설한 탁월한 공적을 쌓았다.”고 높이 평가했다.
2003년부터 현지에서는 선후하여 대령하촌의 기존 혁명기념시설을 토대로 혁명기념정, 항일영렬 료해도의 생애사적 전시관 등을 건설하고 ‘충성’교양기지로 승격, 개조했다. 매년 청명절, 렬사기념일이 되면 당지 중소학생, 간부, 종업원들은 이곳을 찾아 제사와 학습활동을 전개한다.
계구진당위 서기 왕여영은 이렇게 말했다. 최근 몇년 동안 우리는 홍색력사 교양총서를 조직, 편찬하고 홍색자원을 깊이 파고들어 연구관광, 농촌관광을 발전시키고 당의 력사를 잘 배우며 선렬의 정신을 전승하고 미래의 로정을 잘 걷고 있다.
신화사 기자 진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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