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구는 기억한다, 피로 쓴 항전의 서사를…

2025-08-25 09:02:50

로혁명근거지 라자구진.


7월 9일, 왕청현 라자구진 선전위원 허항룡의 안내로 항일투쟁의 력사가 고스란히 담긴 라자구력사전시관 로혁명근거지전시청을 둘러보았다.

“주보중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항일영웅들이 이곳에서 항일작전을 펼쳤고 1945년 쏘련군의 진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 허항룡은 로혁명근거지전시청에 들어서면서 말했다. 전시청에는 유물들과 누렇게 바랜 서류들이 정연하게 배렬되여있었고 항일력사기록, 혁명렬사명록 그리고 ‘사도하자 참안’의 ‘5살짜리 생존자 조월진’과 생존자 리계영, 사계향 후손들의 자술기록이 전시되여있다.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의 설립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는 왕청현에 설립된 마지막 적후항일유격근거지이다.

1930년 9월,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중공라자구구위를 설립했다. 구위의 지도 아래 지역 혁명군중조직은 지속적으로 발전, 확대되였으며 반제동맹, 농민협회, 호제회, 청년단, 소년선봉대, 부녀회 등이 련이어 설립되였다. 9.18 사변 후 구당위는 대중들을 이끌고 매국노, 앞잡이들과 투쟁하고 소작료와 리자를 줄이는 정책을 실행했으며 량곡과 자금을 모으고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며 정보를 전달하고 식량을 운송하는 등 유격대를 협력하여 일본 군경에 맞서 나섰다.

1932년부터 1933년 사이에만 라자구항일유격대는 일제와 15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려 대량의 무기탄약, 식량 및 군용물자를 로획함으로써 라자구유격구를 더욱 공고히 하고 발전시켰다.

1933년말부터 1934년초까지 일본침략자들은 점차 성장하는 동만지역 항일무장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이른바 ‘제2기 치안 숙정 계획’을 추진하며 라자구 및 주변에 대량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기념비.


1934년 봄, 중공동만특위는 항일무장투쟁 형세발전의 수요에 근거하여 라자구를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로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6월 26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3퇀과 제4퇀의 부분적 주력은 주보중이 이끄는 수녕반일동맹군과 항일구국군 사충항, 공헌영, 시세영, 리삼협 등 항일무장세력들과 련합하여 총 600여명의 병력으로 주보중의 지휘 아래 라자구에 주둔하고 있던 위만군과 경찰부대를 습격했다. 사흘간의 격전 끝에 적 300여명을 섬멸하고 라자구 일제괴뢰군 거점을 점령했다. 이후 왕청현내의 다른 항일력량이 륙속 라자구로 모여들었고 중공동만특위도 요영구에서 라자구로 이동함으로써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는 정식으로 설립되였다.


◆사도하자 참안과 적들의 만행

라자구로 이주한 항일 군민이 늘어나면서 이곳은 일제의 주요 타격대상이 되였다.

사도하자촌은 라자구에서 서북쪽으로 20여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주보중 등 항일장령들이 늘 이곳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공산당사령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1935년 정월 대보름날, 100명의 일본병력이 사도하자촌을 포위하고 무고한 촌민들을 상대로 1시간 넘는 학살을 벌렸다. 마을의 대부분 가옥이 재더미로 변했고 근 60명의 무고한 촌민이 살해당했다.

사도하자참안기념비.


9월, 근거지에 대한 적들의 ‘토벌’이 갈수록 심해져 근거지는 점점 축소되였다. 중공동만특위 및 소속 조직은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으로 이동했다.

1936년 2월, 일제 ‘간도협조회 라자구 특별공작반’은 반역자의 안내로 라자구 삼도하자 서산에 있는 당조직 활동 거점을 습격했다. 네명의 당책임자와 교통원이 체포되면서 지방 당조직은 완전히 파괴되였고 라자구항일유격근거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중국 동북을 장기적으로 점령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확장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침략군은 라자구에 련이어 세개의 비행장을 건설해나섰는데 그중 1호 비행장은 완공되여 사용되였고 나머지 두 비행장은 패전으로 항복하면서 완성하지 못했다.

라자구비행장로동자희생자기념비.


1941년 11월, 산동, 하북, 료녕, 장춘 등지에서 온 1000여명의 로동자들이 라자구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였고 3년이 넘는 기간 도합 3000여명이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였다. 수많은 강제 동원 로동자들과 라자구지역 주민들이 렬악한 환경과 과중한 로동으로 목숨을 잃었다.


◆라자구의 해방

1945년 8월 8일,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우리 나라 동북으로 진군했다. 일본군 방어진지를 돌파한 쏘련군은 8월 15일 라자구 태평령전투에서 일본군 600여명을 섬멸하고 2000여명을 포로했다. 이 전투에서 약 2000명의 쏘련홍군 장병이 전사했다. 태평령전투의 승리는 왕청 전 지역의 해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라자구진 태평령에 세워진 쏘련홍군해방탑은 왕청 당원, 간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교양 학습과 기념의 장소가 되였다.

쏘련홍군해방탑


◆력사 명기 미래 개척

2017년 6월에 건설을 시작하고 11월에 개방한 라자구력사전시관은 ‘로혁명근거지전시청’과 ‘라자구력사전시청’ 두 전시청으로 나뉘여있다. 관내의 자료 정리는 당시 라자구진 문화소 소장인 장안잠이 주도했다. 그는 《라자구 문사 전집》 1, 2부를 편찬하며 라자구의 력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현재 퇴직한 장안잠은 “라자구의 력사와 문화를 더욱 자세히 기록한 3부를 준비중”이라며 “사도하자 참안의 생존자 후손들의 자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라자구의 력사 특히 항일전쟁시기의 피의 력사는 후대들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라자구전투유적지.

오늘날의 라자구진은 목이버섯산업으로 지역경제는 물론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견인하고 있다. 허항룡은 “80년 전의 희생이 오늘의 평화를 만들었다.”며 “라자구는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은주 기자


来源:延边日报
初审:金麟美
复审:郑恩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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