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 속에 우뚝 선 ‘민족의 나팔수’ 임광

2025-10-17 09:12:40

오동나무 그늘 아래의 상해시 형산로 811호-<의용군행진곡> 취입기념관(파테빌라)에서 격정적인 항일가요가 울려퍼지고 있다. 참관객들은 숙연한 태도로 20세기 30년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활동한 좌익음악사업일군들의 초상화와 사진을 첨앙했는데 그중 하나는 항일영렬 음악가 임광의 영전 사진이다.

임광은 절강성 승현(오늘날 승주시) 사람으로 1919년 프랑스에서 고학하며 피아노 조률기술과 작곡을 배웠다. 귀국 후 그는 상해 파테음반회사 음악부 주임직을 맡았고 전한, 섭이 등과 함께 좌익진보문예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좌익문화단체 음악소조의 일원이 되였다.

9.18사변 후 임광은 음표를 총알로 삼고 적극적으로 항일구국의 문예선전 사업에 뛰여들었다. 1934년, 임광이 작곡하고 안아가 작사한 영화주제가 <어광곡>은 동명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큰 류행을 일으켰다. 당시 중국 최하층 민중들의 생활 상황을 반영한 이 영화는 임광의 일관된 예술주장을 담고 있다. 그는 작곡가라면 반드시 고생하는 중국 근로대중들의 생활을 체험해야만 대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소리로 작곡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35년 항전영화 《풍운의 아들딸》이 처음으로 방영되였다. 임광은 파테음반 음악부, 전통영화회사 합창단과 함께 영화 속 남성소합창 <의용군행진곡>의 록음제작과 전파를 추동했다. 그는 항전의 거센 물길 속에 뛰여들어 프랑스, 동남아 등 지역을 전전하며 화교화인들 속에서 항일가요 부르기 활동을 벌렸고 <의용군행진곡>의 지휘를 수없이 맡아 중국인의 항전의 노래소리가 세계 각지에 퍼지게 했다.

그가 해외에 보급한 항전가요중에는 널리 알려진 <고향을 되찾자>도 있는데 작곡자 ‘전발’은 바로 임광의 필명이다. “동북의 동포들이여 일어나자! 우리는 망국노가 되지 않으리. 고향을 되찾자, 고향을 되찾자!” 가슴 속 울분을 그대로 뿜어내는 구국가요에는 망국노가 되지 않으려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냈고 중국 군민들의 불굴의 영웅기개를 보여주었다.

1940년, 임광은 엽정 장군의 요청으로 신4군에 참군하였으며 행군 도중에도 쉬지 않고 음악을 창작하여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이듬해 환남사변의 포위돌파 작전에서 임광은 류탄을 맞고 41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당시의 진보신문에서는 그를 ‘민족의 나팔수’로 불렀고 엽정은 그를 ‘중국 음악의 별’이라 찬양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임광의 20여년 음악인생에서 창작, 취입, 보급한 좌익 음악작품이 40~50곡이 된다. 또한 그는 조건을 창조하여 섭이 등 진보청년들을 지원하여 전 민족 항전사의 미담을 빚어냈다.

항일전쟁 승리 80돐을 기념하며 상해 <의용군행진곡> 취입기념관(파테빌라) 3층에서 주제전람이 열렸다. 섭이의 고향 운남 곤명에서 온 여러 진귀한 문물과 자료들은 항전의 봉화 속에서 임광과 섭이 사이에 맺어진 깊은 혁명적 창작우정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어광곡>의 창작지 절강 녕파에서는 좌익음악소조의 후대들이 관중들과 함께 음악극 <어광곡>의 첫 공연을 감상했다. 관객들은 “위대한 항전정신이 음악의 힘을 통해 계속 전승되고 있다.”며 감개를 표했다.

  신화사 기자 허효청

来源:延边日报
初审:林洪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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