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별 □ 김장혁

2025-10-24 09:15:36

나는 아들을 저 멀리 소주로 보내면서 리별이란 그렇게 마음이 아픈 것임을 처음 느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검표구 앞에서 나와 안해를 끌어안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플래트홈에 나가도 종당에는 갈라지겠는데 여기서 작별합시다. 몸이랑 주의하고 젊게 살면서 잘 계십시오.”

작별인사를 끝내자 검표구로 해서 멀어져가는 아들의 훤칠한 뒤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와 안해는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였다.

“이젠 영영 우리 품속을 떠나가는구나.”

나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아들의 뒤모습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서면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리별에 아픈 마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안해도 눈굽을 찍었다.

“대학교로 갈 때는 갔다가 몇달 후에 방학하면 온다고 생각하니 모르겠던데요. 이번엔 저렇게 가면 언제 오겠는가고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비길 데 없어요.”

“아들을 3000원에 팔아먹었구나.”

나는 아들을 보내고 련 며칠 동안 리별의 아픔을 쓸쓸히 감내하면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두달 반이 지나 아들의 녀자친구마저 일본으로 류학 보내게 되였다. 아들을 소주에 보낸 마음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또 두번째로 당해야 할 리별의 아픔이다. 천하에 하지 못할 짓을 한 것 같았다. 장차 아들과 그 처녀애가 다 일본으로 류학을 간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아들과 아들의 녀자친구는 일본으로 류학을 가더라도 나중에 꼭 중국으로 돌아오겠다고 한 것이다. 몇번이고 속뽑이를 하여도 그 애들은 우리 부모 앞에서 꼭 중국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말을 믿어야 했다. 그러나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사람 일이라 우리는 막연하고 불안하기만 하였다. 멀리 소주로 보낸 아들로 마음이 아픈데 국경 넘어 일본 섬에 아들의 녀자친구를 이렇게 보내면 몇해를 지나야 다시 만날 수 있을가? 국내 소주에 있는 아들도 한해에 한번 정도 만나는데 아들은 국경 넘어 일본에 간 녀자친구를 몇해에 한번 만날가?

아들은 녀자친구를 사흘이 멀다하게 만나면서 달 밝은 밤에 헤여질 때면 리별의 슬픔과 상봉의 기쁨을 처음 알게 되였다고 한다. 중국 소주와 일본 고베에 갈라져 시간과 공간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안타깝게 상봉을 기다릴 아들과 아들의 녀자친구가 처량하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와 아들 그리고 아들의 녀자친구의 리별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고 이번 리별이 아프기만 하다. 장차 그 애들이 중국에 돌아와서 또 어느 동네에 자리잡겠는지? 장차 태여나게 될 손자손녀들은 또 어디에 뿌리 내리고 살겠는지…

그런데도 아들은 졸업하자마자 몇천원을 받으니 좋고 26년 사업한 아버지보다도 더 많은 로임을 받으니 기쁘다고 소주로 떠나갔다. 그러나 나는 아들을 몇천원 로임에 팔아먹은 듯하고 돈의 유혹에 아들을 사기당한 듯한 기분이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그래 고작 몇천원이면 사갈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아들에게 몇천원씩 대줄 힘이 없어 이러는가? 그럴 힘이 있어도 우리 애들은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종당에는 애들과의 리별의 아픔을 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들은 기차를 타고 소주로 가고 아들의 녀자친구는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고 말았다. 그렇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워 길림대학까지 졸업시킨 아들을 멀리로 보내는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더우기 공주처럼 기른 딸을 길림대학까지 졸업시켜 일본에 보낸 아들의 녀자친구 부모의 마음이야 얼마나 눈물겹겠는가?

아들과 갈라지기 싫어서 우리는 아들을 보고 연길에 남아 함께 살자고 얼마나 설교하였는지 모른다. 아들의 녀자친구를 일본에 보내기 싫어서 우리는 아들을 시켜 소주에 붙잡아두려고 얼마나 많은 수를 써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처녀애는 기어이 일본으로 가게 되였다. 갓 둥지를 떠나는 그들에게는 더 큰 꿈이 있다. 부모가 바라는 안정된 삶보다는 미래를 향한 꿈과 도전으로 한껏 부풀어있다. 그러니 부모 곁에서의 평범한 삶에 절대 만족할리가 없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한 도시에서 사는 것도 만복중의 하나이다. 모든 것은 돈으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건만 한창 나래를 펼치는 자식들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무리 우리 마음이 간절해도 부모들이 아이들의 의지를 거슬러가려는 길을 막으면 날아오르려는 새들의 날개짓을 짓누르는 격이 되고 만다. 우리 곁에 애들을 남기려고 해도 남겨둘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애들이 잘되기를 바라며 부모는 리별의 아픔을 참으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딸이 큰 꿈을 펼치려 떠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아야만 한다.

이제야 나는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전쟁터에 아들딸을 서슴없이 내보낸 옛날 우리 부모들의 마음이 오죽하였겠는가를 알 것 같다. 그들이야말로 아들딸과의 생사를 모를 리별의 아픔을 여린 마음으로 고통스레 감당해온 대단한 애국주의 부모들이 아니겠는가!

이제야 나는 한 의학교수가 증조할아버지부터 대대로 자식들을 무식쟁이 아닐 정도로 소학교 공부만 시켰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되였다. 그들은 자식들을 너무 공부시키고 세상을 너무 널리 알면 고향과 부모를 떠나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도 부모들의 그런 심정을 하나도 모른 채 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류학가려고 마음 먹었었다. 그것도 당시에는 지금처럼 돈을 내고 정상적인 경로로 류학가기가 힘들어서 모험의 길을 걸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파뿌리처럼 하얀 머리를 흩날리는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 때 나는 뜻을 꺾지 않으면 안되였다.

내가 어머니한테 일본에 류학가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의견을 묻자 어머님께서는 내 예상과는 달리 말리기는커녕 한참 생각하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까지 류학가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고 아주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머님은 이 못난 아들이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모험의 길을 걸으려고 날뛰는 것도 모르고 아들이 잘되기만을 바라고 계셨다.

얼굴에 주름살이 조글조글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어머니를 마주하고 나는 외동아들인 내가 없으면 늙으신 부모님은 누가 모시겠는가고 고쳐 생각하고 그렇게 가고 싶던 일본류학의 꿈을 접고 뜻도 꺾고 말았다.

결국 나는 효성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려는 소박한 길을 선택하였다. 내가 잘살겠다고 늙으신 부모를 고향에 남겨두고 일본으로 가는 불효를 저지를 수 없었다. 꿈을 접고 수수하게 살더라도 부모를 모시고 효성을 다하면서 짤막한 글이라도 쓰면서 내 한생을 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부모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부모자식간에 불필요하고 무모한 애끓는 리별이나 별거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리별이란 영영 없었으면 한다. 물론 쓸쓸한 리별이 있어야 상봉의 기쁨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조석으로 부모자식들이 한자리에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 세상 부모들은 리별의 아픔을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참아나간다. 자식이 이 세상 어데로 가든지 잘되기만을 바라고 자식들이 잘되면 기뻐한다. 부모는 자식의 뒤다리를 절대 잡아당기지 않는다. 조건이 되면 시대의 조류에 따라 자식을 따라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리 사랑은 있어도 올리 사랑은 없다는 말도 잘 안다. 그러나 자식도 부모의 마음을 10분의 1이라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꿈도 좋지만 부모와 함께 누리는 삶이 천륜지락이라는 것을 언제면 알게 될가. 세상에 부모자식이 가까이에서 사는 만큼 행복하고 즐거운 천륜지락이 또 어데 있으랴? 그런 천륜지락은 황금산과도 바꿀 수 없으리라!

충신은 효자가 아니라지만 백가지 선중에 효가 으뜸이란 말도 있다. 부모를 잘 모시고 효성을 다하는 효자로 살면서 꿈도 펼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来源:延边日报
初审:林洪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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