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룡정시 로투구진 용진촌에서 연변사과배 모수(延边苹果梨宗树) 자람새회복활동이 진행되였다. 이 나무는 1921년에 육종가 최창호가 조선 함경북도 북청에서 가져온 참배나무가지를 촌의 돌배나무에 접목시켜 키운 연변사과배의 모수이다. 수령이 105년을 넘으면서 나무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어 연변대학 농학원 풍경원림전업 연구생교외지도교원 송영학이 자람새회복활동을 도맡고 있다.

모수가 있는 최창호 고택의 뜨락 안에는 최창호의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었고 새노란 조짚이엉을 얹은 100년 넘는 최창호의 옛집도 새하얀 회칠벽에 새노란 창문을 달고 아담하게 서있었다.
이날 송영학이 이끈 복원팀은 모수의 일부 가지를 잘라 나무의 영양이 뿌리에 머무르도록 유도했고 나무뿌리가 뻗어있는 범위에 원형을 그리며 도랑을 파고 송영학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생물유기비료를 줬다.

◆100여년 력사의 연변사과배 모수
료해한 데 따르면 연변사과배 모수는 1921년에 룡정시 소기촌(현재의 용진촌)의 최창호가 참배나무가지를 집뜨락의 돌배나무에 가접하여 다년간 길들여 길러낸 나무이다. 애초에 여섯대를 가접시켰는데 그중 세그루가 살아남았다. 1927년에 처음으로 열매를 맺었는데 참배라고 불렀다. 1952년에 중앙정부에서 과수품종을 전면 조사할 때 이 품종을 새로운 품종으로 인정하고 사과배라고 칭했다. 사과배는 90여년을 내려오면서 연변의 각지에 퍼졌으며 연변경제의 기둥산업중 하나로 되였다. 모아산기슭의 만무과원도 주덕해 초대 주장의 지시를 받고 최창호가 사원들과 손잡고 묘목을 키워서 일구어낸 것이다. 사과배는 연변 뿐만 아니라 국내의 10여개 성과 시, 자치구, 나아가 아시아와 유럽 일부 나라에까지 퍼져 우량품종으로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1987년에 당시의 룡정현인민정부에서 최창호 고택 울안의 모수 옆에 ‘사과배선조’ 기념비를 세웠고 1998년에는 연변주인민정부와 룡정시인민정부에서 최창호 고택 뜨락에 또 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세그루 모수 가운데 두그루가 죽고 한그루만 남아있다.
1998년에 세운 기념비에는 이런 내용이 씌여져있다. “사과배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이 연변을 개척한 성과의 하나로서 그 모수는 연변인민이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해 따낸 승리의 상징이며 연변경제의 중요한 유산이며 연변인민의 애국주의 향토애 교양의 산 교과서이다.”

◆모수를 지킨 사람들
최창호가 1967년에 세상을 뜬 후 그의 장남인 최승묵이 모수를 관리했다. 연변1중 교장으로 부임했던 그는 1999년에 병환으로 돌아갔다. 최승묵이 세상을 뜬 후 북경과 심수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의 두 아들은 그곳에서 취직해 살고 있고 최승묵의 부인도 몸이 불편하여 도무지 모수를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리하여 모수와 최창호의 고택은 돌보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모수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으로 잡초더미에 쓸쓸하게 서있게 되였고 1987년에 세운 ‘사과배선조’ 기념비도 파손되였으며 고택 주변에 두른 울타리가 이리저리 넘어져있었다. 꽤 넓은 뜨락은 마을 짐승들의 ‘놀이터’로 되였다.
최창호와 당시 같은 마을에 살았고 최승묵과도 어릴적 친구인 리태수가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되고 나서 모수를 도맡기로 했다.
리태수는 최창호 집안과 꽤 깊은 인연이 있다. 리태수는 어릴적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두 동생을 데리고 소기촌에 사는 큰아버지네 집안에 들어와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같은 마을에 사는 최창호를 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했다. 1961년 봄의 어느 날 최창호는 어엿한 청년으로 자란 리태수를 불러 사과배 풍년을 이루자면 좋은 비료가 많이 수요된다고 했다. 당시 대대 공청단지부 서기로 있던 리태수는 공청단원과 청년들을 조직하여 인분과 돼지, 닭, 양 등 가축의 분변을 모아 부지런히 농가비료를 만들어 사과배나무마다 듬뿍듬뿍 주었다. 가을이 되자 어른 주먹만한 사과배가 가지가 부러지게 주렁주렁 달렸고 그해 도합 40만근의 사과배를 수확했는데 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소기촌은 전 현, 전 주, 나아가 전 성의 모범촌으로 선정되였고 리태수는 우수단지부서기로 표창받았다. 촌민들도 자신들의 신근한 로동이 제값을 받아 잘살게 되여 집집마다 그 귀하던 벽시계, 재봉틀, 라지오와 같은 가장집물을 갖추게 되였다.
최창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손에서 자라온 리태수를 따뜻하게 관심했고 그에게 농사일과 과수재배법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늘 리태수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라고 격려했다. 리태수가 대학에 입학하게 되자 최창호는 자기 자식의 일처럼 기뻐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리태수는 매하구시 생산자료회사에 배치받았다. 그 후 연길현 로투구진 제2중학교에 전근하여 정치학과 교원, 총무처 주임으로 있었고 연변예술학교 총무처 주임, 연변대학 경제무역회사 총경리 등 직책을 맡다가 2001년에 연변대학에서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 최승묵 집안으로부터 모수를 인계받은 리태수는 날마다 연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소기촌으로 출근하다싶이 했다. 외국에 있는 동창생들과 친구들에게도 도움을 청했고 할빈에 있는 비료공장에서 균비료를 구입하여 본격적으로 모수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3년을 견지하여 고목에 움이 트고 꽃이 피는 기적이 일어났고 네번째 해에는 사과배가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영영 사라질 번했던 사과배 모수를 살려낸 성공의 희열에 리태수는 가슴이 뿌듯했다. 2020년에는 모수가 자라는 언덕에 사비를 털어 최창호 선생의 조각상도 세웠다. 또 모수에 의탁해 사과배 관광기지를 건립하는 데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2024년 4월 16일에 연길에서 용진촌으로 가는 길에 음식배달을 하는 오토바이와 부딪쳐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모수를 지키는 일은 또다시 갈 길을 잃게 되였다.
연변대학 농학원 풍경원림전업 연구생교외지도교원 송영학은 고목을 복원시키는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원림업에 종사한 지 30여년이 되는 송영학은 “모수는 이미 2년간 방치돼있었고 현재 죽기 직전인 상태이다. 리태수의 부인 주산옥과의 교류를 통해 모수의 사연을 알게 되였다.”고 밝혔다. 그는 “첫 순서로 우리는 모수가 뿌리내린 토양부터 개량할 생각이다. 토양이 단단하게 굳어져서 영양수송이 원활하지 못했다. 우선 영양공급을 보장해야 한다.”며 “우선 마른 가지와 일부 곁가지를 쳐내서 영양류실을 피면하고 잘라낸 상처에 약을 발라 세균감염과 수분류실을 막을 생각이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뿌리가 뻗어있는 범위에 원형을 그리며 도랑을 파고 비료를 주어 영양공급을 돕는다. 복원과정에 정기적으로 PH치, 각종 영양소 함량 등을 측정한다.”고 설명했다. 송영학에 따르면 복원기간은 올해부터 시작하여 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첫해에는 싹이 자라며 영양가가 류실되지 않게 일부 가지를 잘라버리고 뿌리 쪽 흙에 생물유기비료를 묻는 작업을 하고 두번째 해에는 열매가 달리도록 하며 세번째 해에는 나무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도록 할 계획이다.
송영학은 “연변은 사과배의 고향이고 사과배는 연변의 특산물이자 소중한 문화이다. 모수를 복원시켜 연변의 사과배 문화에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고 이야기했다. 리태수의 부인 주산옥은 송영학과의 담화에서 “남편이 하늘나라에서 모수를 돌보는 사람이 다시 생긴 것을 알게 되면 아마도 기쁘게 웃을 것이다. 모수를 위해 목숨도 걸 정도였으니…”라고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사진 남광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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