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가까이의 세월을 품고 있는 중국조선족농악무

2023-08-14 09:29:47


중국조선족농악무전시관을 찾으면 조선족농악무의 변화,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농악무는 우리 민족의 농경문화와 밀접히 이어져있고 민족의 이주, 정착 력사와 명맥을 같이 해왔다.



중국조선족농악무는 지난 2006년에 국가급 무형문화재 명부에, 2009년에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명록에 등재되였다.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무형문화재에 등재된 민간무용분야 종목이다.

조선족농악무가 시작된 왕청현의 중국조선족농악무전시관을 찾으면 조선족농악무의 변화,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2015년에 마무리 된 중국조선족농악무전시관은 2376만원이 투입됐고 건축면적은 3200평방메터가 된다. 1층은 약 800평방메터가 되는 무형문화재 중국조선족농악전시청이고 2층과 3층은 소극장, 련습실 등 시설이 들어섰다. 이 전시관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조선족농악무를 주제로 하는 전시관이며 무료로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농악무는 우리 민족의 농경문화와 밀접히 이어져있고 민족의 이주, 정착 력사와 명맥을 같이 해왔다.

왕청현은 민족문화 전승에 줄곧 앞장서 왔다. 2006년부터 무형문화재가 학교로, 기업으로, 향진으로, 사회구역으로 깊숙이 스며들어가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학교와 향진, 사회구역, 마을, 민간예술단체에 40여개의 농악무강습기지를 건립했다.

농악이 왕청현 영벽촌에서  시작되였다는 민간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927년 늦가을, 조선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사암리의 10여호 농민들은 지금의 계관향 영벽라자에 이주해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들은 우선 농악대를 조직하여 마을 한복판의 우뚝 선 바위 앞에 놀이마당을 만들어 경쾌한 장단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면서 로동의 질고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했다고 한다. 1930년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농악무와 같은 오락활동이 금지되였고 거기에 기후조건과 물자원 결핍으로 수전농사를 할수 없어서 주민들이 하나둘 영벽라자를 떠나 부근의 서위자, 하마탕, 배초구 등 곳에 이주하면서 영벽라자농악은 점차 다른 지역에 퍼지게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에도 조선족 예술인들과 민간인들은 전통농악을 꾸준히 이어왔고 개혁개방과 함께 농악무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으면서 지금까지 전파되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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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은 조선족 전통농악문화의 발상지이고 그후 길림성, 흑룡강성, 료녕성, 내몽골자치구 등 조선족 산재지역에도 전통농악문화가 류입되면서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100년에 가까운 력사를 품고 있는 조선족농악무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전시관은 중국조선족의 전통문화를 리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있다.

특히 농악무에 사용되는 악기와 의상이 진렬되여있고 또 직접 농악무놀이를 체험해볼 수 있는 전시청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는다.

‘농자천하지대본’이 새겨져있는 농기가 눈에 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세가지 색으로 되여있는 데 각각 하늘, 땅, 사람을 나타낸다. 량쪽에는 후대에 전승된 것으로 옛 예술가들이 만든 농기가 진렬되여있는데 낫과 호미가 새겨져있다.

농악무를 추는 데 필요한 의상과 소품이 진렬되여있는 진렬대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건 초창기 농악무 의상이다. 온통 흰색으로 제작되여있는 옷은 ‘백의 민족’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후 알록달록한 색상이 들어가면서 지금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의상으로 제작이 되였다.

농악은 농악무에서 가장 주요한 부분이다. 농악에 쓰이는 악기는 징, 장구, 북, 꽹과리이다. 선률은 피라와 단소가 연주한다. 악기중에 작은 구리 그릇도 보이는데 이 그릇은 초창기 우리의 옛 예술가들이 사용하던 악기이다. 가볍게 리듬을 치며 들고 다니기에 편한 악기였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작은 그릇이 내는 소리에 맞춰 춤을 췄다.

악기 바로 옆에 중국조선족농악무에 사용되는 상모가 전시되여있다. 상모는 시대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깃털 상모, 호리병 상모, 풀로 엮은 상모가 있었다.

중국조선족농악무는 몇세대에 걸친 노력 끝에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되였다. 우리 농악무의 가장 초기 전수자는 김연희 선생과 량태명 선생이다. 김희연 선생은 26세에 농악무를 추기 시작했다. 영벽라자 마을에서 몇십가구의 농민들을 동원하여 첫번째 농악단를 결성했다. 조득현 선생과 하태일 선생은 중국조선족농악무 무대 공연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1951년에 민간 예술가들과 힘을 모아 농악무를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조득현 선생과 하태일 선생의 노력으로 중국조선족농악무는 중국의 대표적인 민속예술로 자리잡게 되였다. 김명환 선생은 조선족걸궁농악의 전승이다. 2008년에 걸궁농악 전승인 명부에 등재되였다. 김명춘 선생은 지금의 조선족농악무의 국가급 대표전승인이다.

중국조선족농악무는 중국조선족의 민족정신과 령혼이 녹아있는 보귀한 문화유산이다. 이곳 전시관을 찾으면 문화자산을 지키고 전승해 나가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글·사진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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