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차이□ 맹영수

2023-02-17 09:40:45

사노라면 꼭 세대갈등을 겪는다더니 어쩌면 그것은 나와 딸애 사이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나는 60년대생으로서 당시 처한 특수환경으로 인해 가난한 시절을 살아왔기에 내 몸에는 습관적으로 고생과 절약이란 단어가 배여있었다. 하지만 물질이 풍요로운 90년대에 태여난 딸애는 그러한 것과는 담벽을 쌓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세월을 들먹거리며 늘 딸애에게 이른바 ‘전통교육’을 강화했다. 이를테면 고생과 가난, 역경과 분투, 근검절약과 재부… 등을 설명해주면서 딸애가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리고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대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뜻대로 안되는 게 자식농사라더니 딸애가 커갈수록 나와 딸애사이는 이런저런 모순들로 하여 부득불 입씨름을 해야 했다

딸애가 대학을 다니던 때의 일이다. 내 상상 속의 대학생 녀자애들은 단발머리에 안경을 걸고 의자에 기대여 책을 펼치지 않으면 커피 한잔을 놓고 먼 하늘을 보며 그 어떤 명상에 잠겨있는 그런 모습이였다. 하지만 방학에 집으로 돌아온 딸애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였다. 딸애는 머리를 연한 황갈색으로 물들이고 짤막한 샤쯔를 입어 배꼽이 훤히 보이는가 하면 어떤 날에는 또 무릎이 훤히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음악에 맞춰 닭이 모이를 쫏 듯 머리를 흔드는 것이였다. 대학생이라기 보단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행실이 바르지 못한 소녀의 모습이였다. 하늘이 돌고 땅이 돌도록 환장할 판이였다. 나는 먹이를 겨냥한 독사처럼 딸애를 노려보며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헌데 하느님 맙소사!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내 호통에 딸애가 금시 기가 죽어 두 손을 싹싹 문지르며 잘못을 빌 줄로 알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딸애는 평시와 달리 능구렁이처럼 시물시물 웃으며 되려 나를 설복하려 들었다. 숨막히는 여름날 저녁이면 학교 숙사에서 어떤 녀자애들은 브래지어에 반투명 잠옷을 입고도 있는데 이게 뭐가 대단하냐며 나에게 봉건통이란 딱지를 붙이려 들었다. 그러면서 딸애는 자기는 그런 모습을 하지 않으니 그렇게 근심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아무튼 개방세월이라 나는 현실 속에서 엄청 더 과분한 로출현상들을 보아왔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고 그래도 내 딸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게 부모들의 심정이다. 나는 딸애가 류행에는 뒤지더라도 품행이 곱고 학습을 잘하는 그런 숙녀이기를 바라며 또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허나 또박또박 도리를 따지며 돌처럼 굳어진 내 사유를 쪼개는 딸애 앞에서 나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후에 사람들에게 내 불만을 터뜨렸더니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게 요즘 청춘이고 젊은이들이라면서 한쪽 눈을 지그시 감으라 하는 것이였다. 곱게 보면 풀도 꽃처럼 보인다는 말처럼 어쩔 수 없이 한쪽 눈을 감고 봤더니 딸애의 모습이 청춘의 매력으로 보여져서 발랄하기만 했다.

딸애가 석사공부를 할 때도 나는 딸애와의 세대차이를 감지했다.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모 대학에서 석사공부를 하면서 딸애는 여유시간을 리용하여 아르바이트로 화장품판매원을 했었는데 이중 언어를 장악한 대가로 판매수입을 짭짤히 올려 상당한 보수를 받게 되였다. 신이 난 딸애는 그 보수로 두바이, 태국, 싸이판, 베트남… 등 수많은 곳으로 려행을 떠났다. 나는 딸애의 이벤트에 반기를 들었다. 예로부터 가난한 집 자식 일찍 철이 든다고 했는데 우리 집이 그 무슨 부자도 아닌데 그 돈을 절약하여 류학생활에 보태거나 혹은 이후 시집지참금으로 쓰면 좀 좋냐고 잔소리를 늘여놓았다. 이번에도 딸애는 다 컸노라고 곰상곰상하게 나오지 않았다. 집안의 똑똑이보다 나돌아다니는 앉은뱅이가 낫다며 려행은 시야를 넓혀주고 앞으로 인생살이에 수많은 지침이 된다며 그리고 앞으로 가정을 꾸리면 지금처럼 여유시간이 많지 못하다면서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듯 아주 세세히 한수 뜨는 것이였다. 이제 딸애는 철부지가 아니라 한발 앞선 사유를 가진 젊은이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없지 않아 나는 그 후로 더는 내 근검절약을 내세우지 않고 딸애의 려행 자유를 존중해주었다.

석사를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딸애는 남방의 합자기업에서 높은 로임을 받으며 출근하게 되였다. 어느새 딸애는 30대에 들어섰다. 사실 대학 시절부터 적잖은 혼사가 들어왔으나 왠지 딸애는 랭혈동물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모로서 조바심이 든 나는 딸애에게 적지 않은 잔소리를 했었다. 산 좋고 물 좋은 그런 곳이 얼마겠냐고 착각에 빠져 살지 말라며 가끔은 매정한 화살을 쏘기도 했다. 그런데 산이 있으면 나무가 있다더니 어느 날 딸애가 대상자와 함께 집을 다녀오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것도 자유련애를 한지 일년이 되고 상대가 년하이며 또 본인 스스로 집까지 마련한 능력 있는 좋은 총각이라는 것이였다. 듣던중 제일 반가운 소식이였다. 물론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같은 민족이였으면 더 좋으련만 꿩 대신 닭이라고 타민족이여도 반기를 들 생각은 없었다. 새도 날다가 앉고 싶은 곳이 있듯이 연분이란 따로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심사를 거쳐 합격점수를 맞은 미래 사위는 남방으로 돌아간 지 두달 만에 우리를 남방으로 요청하였다. 이른바 사돈대면을 하는 자리였다. 사돈대면에서 바깥사돈이 나에게  ‘례단(彩礼)’을 얼마 요구하는가고 거듭 물어보는 것이였다. 나는 그 것이 한족들한테서 내려오는 전통인 걸 알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본지방풍 속에 따라 간단히 성의를 표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뿔사, 옆에서 딸애가 옆구리를 슬쩍 치더니 우리 말로 생각밖의 수자를 부르는 것이였다. 나는 딸애의 요구를 얼마간 낮추어 바깥사돈에게 액수를 알려주었다. 사돈은 내 의사를 존중하면서 거기에 길한 수자로 더 보태주겠다고 흔쾌히 대답하였다.

사돈의 흔쾌한 답복을 받았지만 왠지 나는 부담을 준 것 같아 딸애를 나무람했다. 그런데 웬걸 딸애의 대답이 가관이였다. 자기도 애정의 순결파이기에 지나친 례물은 바라지 않지만 적당한 례물은 가치와 긍정이기에 바란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가물에 단비이듯 흔치 않게 조선족 며느리를 삼으면서 그것도 부모님을 떠나 물 설고 산 선 곳으로 시집가는데 그만한 대가는 받아야 하고 30대여도 절대 ‘렴가품’은 아니란 걸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솔직하면서도 기가 찬 딸애의 변명에 나도 그만 수긍하고 말았다. 물론 딸애는 그 돈을 망탕 쓰지 않고 씨돈으로 만들어 량가집 부모들에게 효도 한번 잘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아무튼 속타산이 너무 야무진 딸애여서 나는 또 한번 깊은 세대차이를 느꼈었다…

누군가 세대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한틀에 매워 한 우물 안에서 살 수 없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어쩌면 세대차이는 사회의 필연적 추세이고 발전의 동향이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했다. 전통을 고집한다고 꼭 보수가 아니고 발전을 꾀한다고 꼭 진보가 아니듯이 어떻게 사느냐는 사람마다의 선택이고 시대의 선택이다. 그만큼 우리는 상대방에 서로 자기의 관점같은 것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조류를 따르고 젊은이들을 배려해주는 것도 별로 기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필경 세상은 우리의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청춘들의 것이 아니겠는가?

청춘은 파도와 같다. 기발한 사유도 그들만의 특권이다. 세대차이, 그냥 곱게 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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